싱싱한 채소에 담긴 따듯한 마음, 채소 가게
복닥복닥한 풍경이 오가는 곳
취재. 이현경 기자

 “오늘 채소 정말 좋다. 좋아~.”
 경동시장 안 골목의 삼거리에 위치한 아담한 채소 가게 하나. 새벽 1시부터 가게 불은 이미 환했다. 요즘 많이 팔리는 무, 미나리, 알배기 배추, 대파가 진열대에 모습을 드러낸 건 오전 9시경. 여기에 당근, 호박, 파프리카 등을 꺼내놓으니 가게는 권혁심 씨의 고운 모습만큼이나 화려한 색으로 치장을 마쳤다. 권 씨의 남편은 새벽 1시부터 7시 반까지 도매로 많은 양의 채소를 판매한다. 이후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는 권 씨가 채소를 파는 시간. 28년 경력이 물씬 풍기는 움직임에 채소 가게는, 이내 손님을 맞이할 더없이 흥미로운 무대로 변한다.

 시장 풍경을 활기차게 만드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 그중 권 씨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저 멀리까지 뻗어 나갈 만큼 또렷하다. “골라가세요. 오늘 미나리가 싱싱하고 좋아요.” “적겨자를 넣으면 얼큰한 맛이 나고 포도주색이 우러나와요.” 아는 사람과 대화하듯 오가는 이들에게 말을 건네자 사람들이 일제히 가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는 “미나리는 얼마에요?” “이거 연한가요?” 등 각양각색의 질문들을 쏟아낸다. 가게에서 파는 채소로 직접 요리를 한다는 권 씨. 그렇기 때문에 채소의 알맞은 요리법과 그 맛을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니 채소를 한 묶음만 사려고 하던 손님도 나중엔 다른 채소에 손을 뻗는 것이다. 손님들의 질문은 이어지고 계속 또 이어진다. 그러더니 이윽고 장바구니마다 싱싱한 채소를 가득 채운다. 한 손님은 “여기만 오면 이상하게 많이 사게 되네요. 물건이 싱싱해서 그런가 봐요.”라는 말과 함께 기분 좋은 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때론 말보다 손님을 알아온 세월이 빛을 더 발할 때도 있다. 오늘은 마침 혜화동 할머니가 찾아왔다. 혜화동에서부터 이곳까지 찾아와 채소를 사 가는 오래된 단골손님이다. 굳이 길게 말하지 않아도 척척, 할머니가 원하는 물건을 담아주는 그녀. 할머니가 떠나자 이번엔 다른 곳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노점을 운영하는 할머니는 별말 없이 손짓으로 채소를 고른다. 할머니가 고른 채소를 즉석에서 빠르게 손질한 권 씨가 봉투에 담은 채소들을 장바구니에 가지런히 넣으며 할머니에게 묻는다. “여기까지 오셔서 손에 들고 다니시면 많이 무겁죠?” 사뭇 걱정스러운 표정의 권 씨에게 할머니는 괜찮다는 답을 손짓으로 대신한다. 그리고는 오히려 내일 필요한 물건들까지 미리 주문을 한다. 오래된 단골손님들은 이렇게 다음 만남을 기약한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긴 시간을 함께해온 익숙한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손님이 지나간 후 틈틈이 빈 진열대를 채우는 권 씨는, 상자 속 싱싱한 채소들을 항상 꼼꼼히 확인한다. 더 좋은 채소를 손님에게 주려는 마음 때문에 잠시도 쉴 틈 없이 바쁘다. 이러한 성품은 그녀가 스물두 살에 결혼해 16년 동안 농사를 지었을 때도, 자녀들을 위하는 마음에 서울로 올라와 장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 즈음엔 다른 곳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이웃 상인이 찾아왔다. 권 씨에게 특별한 존재인 그. 비록 서로의 가게는 떨어져 있지만, 같은 동네에 살면서 가게 문 닫는 일도 도와주고, 퇴근도 같이하는 사이다. 권 씨는 그에게 아낌없이 채소를 담아 건넨다. 그러자 그가 “마음이 어른 같아. 얼마나 너그러운지 몰라.”라는 말로 고마움을 전한다. 이 말을 들은 옆 상인도 “팔방미인이지. 못하는 게 없으니까.”라며 한마디를 거든다. 집 안 숟가락 개수까지 꿰고 있을 정도로 한 식구가 된 이웃들. 손님이 오가던 골목이 순식간에 대화의 장으로 펼쳐진다.
오후 일과의 시작 전, 권 씨가 종이컵에 따듯한 차를 따른다. 이렇게 따듯한 음료를 마실 때면 김정덕 교무가 떠오른다. 법회가 끝나면 가게 일 때문에 늘 먼저 일어서기 바빴던 그녀. 그런 그녀에게 김 교무는 “딱 1분만 함께 커피 마실 시간을 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었다. 그 1분이라는 시간 동안 교무님과 커피를 마시며 하루의 일을 생각하고 돌아보았던 추억이란, ‘마음을 둥글게 돌리는’ 그녀의 마음공부를 지금까지 계속 이어오게 해주었다.

 오늘도 채소 가게의 안과 밖엔 여러 사람이 머물다 간다. 그 풍경 속에서 권 씨가 가게 한가운데에 원의 중심처럼 앉아있다. 그녀 앞에 가지런히 진열된 채소는 푸른빛뿐 아니라 여러 색을 담고 뽐낸다. 이런 풍경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이, 깊어지는 생각과 함께 오묘하고도 고운 빛으로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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