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있는 나의 일상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누워 돌이켜보면,오늘 하루 어느 시간도 쓸모없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글. 김미혜

 나는 이제 막 결혼 2년 차에 접어든 새댁이다. 해가 잘 들어오는 따뜻하고 아담한 집에서 남편과 고양이 2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결혼하고 몇 달 동안은 ‘우리 집’이라고 하면 엄마·아빠와 함께 살던 친정집을 떠올렸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집’ 하면 지금 내가 살고있는 집이 떠오른다. 한낮에 가림막없이 온전히 들어오는 햇살에 늘어져 잠든 고양이들이 있는, 이 시간이 내가 우리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남편의 직장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 그 말은 즉, 남편의 출근 시간이 다른 직장인들처럼 일정하지 않다는 말이다. 어떤 날은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고, 어떤 날은 저녁에 출근해서 아침에 퇴근한다. 결혼 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는 나는 남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는 뜻이다.

 결혼 후 두 달을 지내본 우리는 반려동물을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일 때문에 일주일에 서너번 낮에 집을 비워야 했기에 상대적으로 외로움을 덜 탄다는 고양이를 데려왔다. 첫째를 데려와 함께 산지 9개월차, 고양이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대던 우리는 아기 고양이 한 마리를 더 데려왔다. 그렇게 사람 둘 고양이 둘, 남자 둘 여자 둘 성비까지 완벽한 우리 가족이 되었다.
결혼 후 나는 두세 달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집에서만 지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마음껏 늦잠을 자고, 평일 대낮에 커피숍도 가보며 한가로운 백수생활을 즐겼다. 그런데 두 달째부터 집에 있는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마치 내가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점점 우울해졌다. 두세 달의 백수생활이 ‘내가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닫게 해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의 나는 매우 쓸모있는 사람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고양이들이 나를 찾아와 눈을 마주치며 내 손에 얼굴을 부비고 운다. 아침 간식을 달라는 의미이다. 물론 고양이의 언어이기에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간식을 줄 때까지 쫓아다니는걸 보면 내가 제대로 알아듣는 게 맞는 듯 싶다.

 고양이들의 아침 간식을 챙기고 나면 어떤 날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패스트푸드점으로 출근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밀린 빨래와 설거지, 청소를 한다. 때론 잠든 고양이 옆에 누워 낮잠을 자기도 하고 고양이 간식을 챙기거나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쥐 인형을 실컷 흔들어준다. 단조롭지만 고양이 덕에 지루하지 않은 하루를 보낸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잠자리에 누워 돌이켜보면, 오늘 하루 어느 시간도 쓸모없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던 두세 달의 백수생활은, 나의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앞으로도 나의 모든 시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 수 있기를….

 

일요일 오전

아직 지나지 않은 시간에 대한 나의 느긋한 일요일 공상은 항상 즐겁다.

글. 김경민

 일요일 오전엔 저절로 눈이 떠진다. 평소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주중 일과 덕에 주말 밤늦게까지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 집에 와도, 일요일 오전에는 꼭 그렇다.

 일요일 아침엔 주로 라면이나 빵처럼 조리가 손쉬운 것들을 먹는다. 간단히 끼니를 챙긴 다음엔 설거지를 하면서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다. 그러면 설거지를 끝내는 시간과 커피 원두에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리는 시간이 거의 맞아 떨어진다.

 그 다음 커피잔을 들고 책상에 앉는다. 평소에 쓰는 펜과 손바닥 크기의 스케줄러를 내 앞에 놓으면 이때부터 고요한 일요일 아침,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 시작된다. 한두 시간 동안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으며 시간의 압박도 받지 않는 것이다.

 책상에 기댄 채 다음 주에 해야 할 일과 미리 잡힌 약속을 스케줄러의 빈 곳에 채워 넣는다. 그러나 여기엔 하나의 규칙이 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일정은 쓰지만, 일요일은 비워두는 것이다. 스케줄러에 적힌 날짜들을 보며 다가올 그 날을 찬찬히 가늠해본다. ‘이날은 바쁘겠구나, 이날은 집에 일찍 들어갈까 아니면 영화라도 한 편 보고 들어갈까.’ 하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다. 돌아올 일주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일은, 내게 일에 대한 적당한 책임감과 긴장감을 준다. 그러는 동안에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이나 하고 싶었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도 한다. 새로운 일들에 대한 설렘을 느끼는 이유다. 아직 지나지 않은 시간에 대한 나의 느긋한 일요일 공상은 항상 즐겁다.

 그러나 이런 시간의 필요성을 느끼고 즐거움을 얻기까지는 꽤 연습이 필요했다. 의식적으로 행동을 반복하고 나서야 주말의 한 토막을 비우는 습관을 지닐 수 있었다. 예전에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늘 바빴고, 금요일 밤부터 주말의 끝도 매번 무척이나 빠르고 야속하게 흘러갔다. 그렇게 주말이 오면 지친 일과에서 벗어난 해방감에 정신없이 놀다가 어느새 찾아온 월요일을 맞이했다. 이런 식으로 매번 월요일이 두렵게 다가오는 게 너무 싫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하루하루 시간에 쫓긴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다짐했다. 정신없이 빨리 지나가는 휴일 속 찰나를 느린 박자의 시간으로 보내자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나의 시간을 관리해야 했다. 실제로 책상에 앉기까지 삼 주에 한 번, 이 주에 한 번씩 실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몇 번이나 직접 체험해 본 후에야 같은 시간이라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체감하는 게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이제는 주말 오전의 한 토막이 어느덧 내게 즐거운 시간으로 자리 잡았고, 여유로운 그 시간뿐 아니라, 그 시간이 끝나도 설렘을 느낀다.

 한 주의 마무리와 동시에 시작점인 일요일, 그 오전에 나는 나에게 온전히 집중한다. 나 자신과 내가 보낸 시간을 돌아보는 이때, 나는 이 시간을 참 좋아한다.

 

진정한 고독을 위해

진정한 고독을 위해 이불을 걷어차 버리자고!

글. 신광섭

 얼마 전 SNS에서 ‘집돌이 집순이 특징’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봤다. 약속을 잡거나 사람 만나는 것을 귀찮아하고 주로 집에 있고 싶어 하는 요즘 사람들의 행태를 다룬 내용이었다. 댓글 반응을 보니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는 듯 했다.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유행어도 있다. 혼자를 선호하는 현대인들의 심리를 더욱 공격적으로 나타낸 표현이다. 그뿐만 아니라 ‘혼밥, 혼술, 혼영’* 같은 신조어를 듣는 것도 어렵지 않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혼자만의 시간을 추구해가고 있다.

 나 역시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한다. 혼자 카페에 가서 진한 커피 향을 만끽하며 책을 읽거나, 사색하곤 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 요즘은 혼밥에, 심지어 혼영을 하기도 한다. 처음엔 아무래도 어색했지만, 해볼수록 괜찮다. 아니, 오히려 편하기까지 하다. 점점 더 개인주의 분위기가 팽배해지는 요즘, 이는 아마 누구나 한 번쯤은 느꼈을 ‘고독의 즐거움’의 한 모습일 것이다.

 이렇게 혼자인 것이 편하고 즐겁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계속해서 생기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혼자만을 추구하는 성향이 과연 좋은 걸까? 이런 사회의 분위기는 괜찮은 걸까?’ 하는 것들 말이다.

 의구심을 풀 열쇠를 나는, 참여 중인 독서 모임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영역이다. 다시 말해 혼자 해야 하고, 혼자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책을 통해 저자 혹은 스토리라는 타자를 만날 수 있지만, 아무래도 혼자서만 책을 읽고 끝내면 나만의 생각이나 감정에 갇히기 쉽다.

 그런데 독서 모임은 이 한계를 극복해준다. 모임을 하다보면 매번 놀란다. 같은 책, 같은 구절을 읽었는데도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나는 나만의 생각이나 감정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 독서 모임은 책을 읽는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혼자 하는 것과 함께 하는 것의 절묘한 ‘균형’을 통해 독(獨)서가 아닌 진정한 독서(讀書)를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는 독서 모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쉼과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고독의 시간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함께 어울려 때론 부딪히고 때론 위로를 얻는 만남의 시간이 갖는 의미는 혼자의 시간과는 다르게 중요하다. 인간은 결국 혼자일 수 없다. 잘은 모르지만, 실존주의 철학에서 인간 존재에 대해 탐구하며 타인의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 그토록 애썼던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타인을 통할 때 나의 존재를 더욱 새롭고 적확하게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진정 나 자신으로 고독하기 위해선, 아이러니하게도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 권유하고 싶다. 진정한 고독을 위해 이불을 걷어차 버리자고! 이불 밖은 위험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위험은 아마 삶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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