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에서 대산으로 이어진 옥추경 기도와 신통묘술
글. 이정재

 대산의 <옥추경> 해설에서 본 ‘중앙단원 기도문’이라는 언급을 대산이 옥추경 기도를 행했음을 알 수 있는 단서로 이해했다. 
 
 대산종사법문집 제5집 옥추보경의 해석을 옮겨본다. 특히 기도문 마무리 부분에서는 ‘용도자지미(用道者知微)’를 해석하면서 끝내고 있다.  
 
 “도를 쓸 줄 아는 사람은 미한 자리, 현묘난측한 자리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알아야 참으로 아는 사람이다. 거기서 허령, 지각, 신명이 나온다. … (중략) … 주송(呪誦)을 한다든지, 선을 한다든지, 염불을 오랫동안 하면 첫 단계가 허령(虛靈)이 열린다. 그래서 안 보이는 것이 보이고 앞일을 내다보려고만 생각하면 보이는 것이다. … (중략) …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너희들이 지니고 다닌다. 창가가 있는데 단전주를 해서 거기에 정력을 모을 것 같으면 허령이 열리는 수가 있다. … (중략) … 무이구곡 거기에 면면약존(綿綿若存) 용지불근(用止不勤)하면 거기서 허령이 열리는 것이다.”

 면면(綿綿) 운(云)은 노자 <도덕경> 6장에 나오는 것이고, 무이(武夷)는 주희가 지은 복건성 무이산의 절경을 노래한 것이다. 즉 기묘한 현상이 단전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노자의 영원한 근원 현빈(玄牝)은 천지의 근원인데, 아무런 애씀도 없이 저절로 흐르는 것이란 뜻이다. 소위 소주천, 대주천을 돌리다 기의 순숙으로 인한 환골탈태의 영원한 자아 ‘적자(赤子)의 탄생’까지의 과정을 논한 내용이다. 불교로 치면 법공(法空)의 과정이 될 텐데, 이에 대한 총평은 이미 대종경 수행품 42장에서 논한 바 있다. 그러나 소태산은 이의 효용성을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다. 대산은 옥추경을 도교의 정수라 인정하면서, “대종사님 당시 옥추경을 많이 말씀하셨다.”는 부촉을 하며 옥추경 기도에 대한 완곡한 표현을 하였다.

 옥추경 기도 당시 전해오는 일화들이 있다. 기도 중에 일어나는 신비한 현상들에 대한 것이다. 이는 대산이 해설한바 허령과 신명의 맥락과 일치한다. 통령 기도는 자고로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신비 현상이나 정신적 중압감을 견딜 수 있어야 하고, 정신 수양이 어느 정도 순숙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사실 전통적인 통령법 수행의 연장선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구인기도시 백지혈인 이외의 신비 현상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오지 않는다. 그런 현상이 없었을 수도 있었겠으나 그를 경계했기 때문이리라. 이 지점에서 다음의 법문이 연관된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정법 회상에서 신통을 귀하게 알지 않는 것은 신통이 세상을 제도하는 데에 실다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폐해가 되는 까닭이니 … (중략) … 허무에 집착하여 주문이나 진언(眞言)등으로 일생을 보내는 것이 예사이니 … (중략) … 그러나, 사람이 정도(正道)를 잘 수행하여 욕심이 담박하고 행실이 깨끗하면 자성의 광명을 따라 혹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자취가 나타나는 수도 있으나 이것은 구하지 아니하되 자연히 얻어지는 것이라.」”(수행품 42장)

 여기 보이는 신통묘술과 이적에 대해서는 선외록 초도이적장 1~8절에 걸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소태산 자신은 물론 제자들의 신통력에 대해서 큰 경계를 하였다는 내용이다.

 소태산이 이적을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시기는 연화봉 수행 이후의 일이고, 소태산 자신도 이때의 공부가 깊었던 것으로 회상되고 있다(대종경선외록 3. 구도고행장 2절, 대산종사 법문집 3~5집 등). 이 시기가 옥추경 기도와 연관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고, 이는 대산이 풀이한 옥추경 해설의 부분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다. 소태산은 여기서 얻은 경험을 살려 구인기도에 적용하였고 역시 기도의 효험과 성공을 보았다.1)

 그러나 소태산은 허령과 신명을 위해서만 옥추경 기도를 활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정신통일과 정신무장을 위한 것이었고, 욕심이 담박하여 구하지 아니하되 자연히 얻어지는 것으로 삼았다. 구인 단기도가 이를 입증한다. 이 경우 백지혈인이라는 허공법계의 감응으로서의 이적이 있었으나 그것이 또한 목적은 아니었던 것이었다. 철저한 결속력 다지기와 정신무장의 과정에 더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여기저기서 행했던 제자들의 기도가 그것을 반증한다. 그러나 기도과정 중에 일어나는 신비한 현상이나 신통력 상관의 현상들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 호 ‘대산의 <옥추경> 해석과 옥추경 기도’의 글을 읽고 교단의 어른이 필자에게 연락을 주었다. 전해들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산과 옥추경에 대한 앞선 설명에서 법문집의 ‘중앙단원 기도문’에 관해 이 부분은 대산이 소태산으로부터 받았던 기도문이 아니다. 이 부분은 정산이 공부했던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다. 즉 중앙단원 기도문에 관한 것은 대산과는 무관하고 정산과 연결을 지어야 한다. 삼동원에서 대산을 모시고 공부할 때 분명히 전해 들었다. 대산은 정산으로부터 옥추경 기도법을 전해 들었다.”

 대산은 1924년 11세에 처음 소태산을 만나고 16세인 1929년에 출가를 했다. 이때부터 김대거는 줄곧 총부를 떠나지 않았다. 이공주와 김영신이 총부와 경성에서 옥추경 기도를 하던 때는 1928년경부터다. 막 입문한 어린 나이에 기도식에 동참하였을지도 의문이지만, 더구나 중앙단원의 위치를 점하여 중앙 기도문을 받았는가는 더욱 생각이 불가하다. 이렇게 보면 앞선 선진의 부촉에 일리가 있다. 즉 대산이 언급한 중앙 기도문에 대한 것은 정산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다음의 표현은 이를 반증한다.

 “불교의 정수를 반야심경이라고 한다면, 도교의 정수는 이 옥추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종사님 당시 옥추경을 많이 말씀하셨다.”

 밑줄 그은 부분은 소태산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말씀일 수도 있고, 정산을 통해 들었던 내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살핀바, 대산이 기도식에 직접 참여하였다는 정황이 미흡하다. 오히려 대산은 1931년에 나온 <보경 육대요령> 세대에 해당된다. 이것을 접하였던 대산의 나이가 겨우 18세였으니 옥추경 기도가 점차 약화될 시점과 육대요령의 강화는 대산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산이 정산으로부터 옥추경을 전해들은 것은 훨씬 그 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정산으로부터 들었던 내용은 그 기도법과 효용성에 대한 것도 해당된다. 그리고 대산은 이를 실제 기도에 활용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앞서 살펴본 바 신비한 체험이나 통령의 언급을 사실처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 더 살펴볼 사안은 중앙단원 기도문에 대한 것이다. 대산이 설명한 해당 옥추경의 내용은 천경의 부분으로, 경의 전반부에 나올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도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다. 즉 옥추경의 가장 주요한 부분을 중앙단원으로 책정을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소태산으로부터 받았던 기도문과 공부법을 정산은 다시 대산에게 그대로 전수한 것으로, 이는 법통 계승의 자연스러운 흐름과도 이어지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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