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정재응 피디
느린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취재. 장지해 기자

 방송 피디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전해져오는 정설(?)이 있다.
 그건 바로 ‘시험에서 스무 번 이상 떨어져야 피디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라고 피해갈 수 없었다. 역시나, 스무 번 넘는 낙방 후에야 EBS에 입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로 경력 23년 차. 지난 9월 1일 방송 90주년 기념 방송발전유공 국무총리표창을 받은 정재응(법명 재현, 강남교당) 피디.
 ‘방귀대장 뿡뿡이’를 비롯해 다양한 유아·어린이 프로그램을 연속 히트시켰던 그이지만, 요즘의 그는 ‘위대한 로마(2013)’ ‘천불천탑의 신비, 미얀마(2015)’ ‘불멸의 진시황(2017)’ 세 편의 문명사 다큐멘터리(이하 다큐)를 연속 흥행시키며 ‘문명사 다큐 전문 피디’라고 불린다. 유아·어린이 전문 프로그램과 문명사 다큐를 연결짓지 못하는 호기심을 눈치 챈 그가 “제 경력이 좀 특이하죠?”라며 웃어보이는데….
 3D 입체 다큐의 문을 여는데 한 몫을 담당한 로마, 꽁꽁 닫혀있던 역사를 최초로 담아냈던 미얀마, 그리고 전혀 새로운 해석으로 국내 다큐 사상 최고가로 판매된 진시황까지…. 국내 다큐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그는 정말 개척자다.

● 세 편의 문명사 다큐멘터리가 모두 좋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사실 저는 영국의 BBC나 일본의 NHK를 뛰어넘는 다큐를 만드는 게 목표에요. 실제로 ‘미얀마’나 ‘진시황’은 미국 채널에 국내 다큐 사상 최고가로 판매가 되었고, ‘위대한 로마’도 영국에서 블루레이로 판매되고 있어요. 제작비나 업무 환경 등이 그곳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악조건 속에서 같은 급의 퀄리티를 내고자 한 노력이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것이니 성공했죠. 목표를 향한 가능성과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도 기쁘고요.”
불과 10년 전만 해도 국내 방송가에서 다큐 제작비가 10억을 넘긴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소재와 콘셉트만 좋다면 공동 제작을 통한 펀딩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충분히 가능한 일이 되었다. 물론 그 길을 처음 개척해 나가야 했던 정 피디에게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 ‘다큐는 재미없다는 상식을 깬 피디’라는 평가를 받던데요.
 “제가 다큐를 만들 때 추구하는 건 ‘삼색 다큐멘터리’예요. 세 가지 색깔, 새롭고, 재미있고,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새롭다는 건 아이템 자체가 새로울 수도 있고, 기존의 아이템을 전혀 새롭게 해석해내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이게 없으면 차별화가 되지 않죠. 익숙한 걸 계속 보고 싶어 하는 시청자는 없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새로워도 재미가 없으면 안돼요. 과거의 다큐들은 썰렁한 무덤이나 묘비, 정지되어 있는 유물이나 책을 보여주면서 나레이션만 잔뜩 늘어놓았었죠. 그런데 이제는 드라마적 요소도 넣고,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해서 영상적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게 해줘야 해요. 그리고 반드시 의미가 담겨야죠. 아무리 재미있게 봤더라도 돌아서서 남는 메시지가 없으면 허무하잖아요. 이런 걸 통해서 행동이나 의식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의미가 있다면 더 좋겠죠. 종교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어요. 시청자(수요자)의 입장을 늘 염두에 둬야죠.”

● 새로운 발상과 아이디어를 얻는 노하우가 있나요?
 “사소함의 법칙이라고, 굉장히 작은 것에서 큰 것이 결정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큰 것은 물론이고, 사소한 것도 이룰 수 없더라고요.”
‘방귀대장 뿡뿡이’를 제작하던 시절의 이야기 한 편을 꺼내는 정 피디. 당시 ‘뿡뿡이랑 야야야!’라는 프로그램을 동시 제작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순회공연을 하던 때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와 아빠가 함께 방송에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전무하던 상태. 그런데 엄마와 아빠를 모두 초대한 그 날, 중계차 속 7~8대의 모니터에 보이는 아빠들은 상상 이상의 표정과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날 이후 ‘아빠랑 나랑 부비부비 빠빠’라는 제목으로 아이와 아빠가 함께 신나게 놀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해 사내 기획안 대상 수상을 비롯해,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는데.
“사소함의 법칙은 그런 거예요. 엄마와 아빠를 동시에 초대한 그 방송을 딱 한 번 했거든요? 그걸 여러 사람이 봤을 거잖아요. 그런데 거기에서 색다름을 캐치하느냐 못 하느냐가 아이디어의 차이로 이어지는 거죠. 항상 보는 익숙함 속에는 늘 새로움이 있어요.”

● 방송제작은 특히나 ‘함께’의 의미가 중요하잖아요?
 “저는 후배들에게 ‘피디는 능력 있는 동료로서 존재해라.’라고 자주 이야기 해요. 여기서 능력은 많은 전문가들이 가진 특성과 전문성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건데, 그건 피디로서 당연한 자질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동료’여야 해요. 피디와 스텝 이전에 ‘우리’ ‘우리 작품’이라는 의식이 공유되는 게 중요하지요. 그게 형성되면 어떤 스텝도, 어떤 전문가도, 자기의 능력 그 이상을 해내거든요. 주인의식이 들어가니까요. 피디가 ‘이 음악 넣어줘.’라고 해서 넣은 음악이 칭찬을 받으면, 음악감독이 기뻐할까요? 피디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주어진 콘셉트 안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만들어내서 얻은 반응이 더 기쁘겠죠. 피디만의 것이 아닌, ‘함께 만든 우리 것.’이라는 것을 한 번 경험하고 나면 그 다음은 그 이상의 작품이 나와요. 더 잘 해내려고 하거든요.”

● 원불교 문화콘텐츠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문화의 발전은 환경과 100퍼센트 관계가 있어요. 저는 지금까지 일을 해오면서 ‘그 시점’에 핫한 테크놀로지(3D, 4K 등)의 흐름을 잘 타오고 있는 편이에요. 아무래도 그 분위기 속에서 일을 계속하다 보니까 제가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관련 정보를 쉼 없이 제공해주는 환경이 된 거죠. 그런 면에서 보면, 원불교 문화도 서울이 아닌 익산이라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을 거예요. 굉장히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가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데, 변화를 싫어하면 100년 전이나 10년 후나 늘 그대로겠죠.”
주변에 어떤 사람이 있고, 그들과 어떻게 소통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의 흐름에 시의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부처님께서 ‘대중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말의 본의가 ‘단순히 서울의 어느 동네에 어떤 교당이 들어섰다.’는 것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삶에 완전히 녹아드는 것으로써 완성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특히 젊은층을 타깃삼아 생기발랄하고 통통 튀는 원불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한다.

● 생기있는 원불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친근하고, 젊고, 생생하게 다가가야 해요. 미얀마 사원에 갔을 때 정말 깜짝 놀란 게, 아이들부터 가족, 할아버지, 젊은이들을 망라하고 하하호호 웃으며 뛰어다니고 심지어 잠을 자기도 하더라고요. 시끌벅적한 장터 분위기인거에요. 어느 한 가지 모습으로 특정 지어진 사원이 아니라, 그냥 삶의 한 부분으로서 사원인 거죠. 교당도 좀 시끌벅적했으면 좋겠어요. 너무 엄숙하지 않고 대중에게 활짝 열려있는 곳으로서의 종교로요.”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만 어려운 ‘원불교만의 용어’에 대해 ‘변호사나 검사들이 어려운 법률 용어를 써가며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을 덧붙이는 그. 쉽게 풀어야 누구라도 부담없이 다가올 수 있는 것은 당연하고, 쉽게 푼다고 해서 잘못된 게 아니지 않냐는 것이다.

● 힘들고 지칠 때 보감 삼는 문구가 있으신가요?
 “‘느린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멈추는 것을 두려워해라.’라는 의미의 ‘불파만 지파참(不慢 只站)’이라는 말을 오랫동안 마음에 새기고 살았어요. 보통의 우리는 어떤 목표를 향해 갈 때 속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세상일이라는 게 꼭 내가 계획한 일정대로만 이루어지진 않잖아요. 속도보다 두려워해야 하는 건 그만두는 시점 같아요. 시도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나요? 여러 번 계속 시도해야 그중에 성공을 가질 수 있죠. 저도 스무 번 넘게 떨어지고 나서야 피디가 됐는걸요. 하하. 실패의 경험도 결국은 차곡차곡 쌓여서 내 것이 된다는 걸 알아서,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을 전해주세요.
 “저는 본래도 긍정적이었지만, 일을 하면서 더 긍정적이게 됐어요. 물론 국제공동제작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때 두려움이 당연히 있었죠. 그런데 그때 ‘유럽이든, 미얀마든, 중국이든 사람이 하는 일이고, 또 충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 아니냐. 그리고 실패하면 뭐 어때.’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어요. 일하는 스타일이나 사회시스템이 우리와 전혀 다른 곳에서 해낼 수 있었던 건, 역시 긍정의 힘 덕분인 것 같아요. ‘순리(順理)대로 간다.’고 쉽게 이야기하는데, 제가 생각하는 순리는 ‘아무런 문제없이 가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는 문제를 다독거려서 긍정적이고 부드럽게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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