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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어느새 가을 나루에 닿다 2017년10월호

어느새 가을 나루에 닿다
취재. 노태형 편집장

 햇살이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화를 많이 삭인 모양이죠. 분노의 강을 건너면 스산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아, 어느새 가을 나루에 닿았네요. 대지의 노란 물결 위로 저 멀리 하얀 돛단배 한 척이 떠오릅니다. 도회지로 떠난 아이들을 싣고 오는 귀향선인가요. 가슴 뛰는 소리 이리 요란한 걸 보니 그리움의 상처가 꽤 컸나 봅니다. 어머니 아버지 형제 그리고 마음에 담은 사람들….

 30여 년의 서울살이도 고향을 잊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가 내가 태어난 집인데, 어찌 그립지 않겠어요.”

 그는 서울에 세간을 남겨 놓은 채 봄여름가을겨울 왔다 갔다를 반복한다는군요. 고향 집에 내려온 지 어느새 10여 년, 그의 얼굴은 고향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밭으로 반찬거리를 가지러 가는 모습에도 허둥지둥 가을 햇살이 배어 있습니다. 몇 개 안되는 가지며 오이를 안고 오는 모습이 마치 보물을 얻은 듯 조심스럽습니다.

 “자연에서 얻은 물건들만큼 소중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알고 보면 사실, 이 세상에는 정말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들만이 우리의 생명을 지켜줍니다. 무기로도 지켜내지 못하는 우리의 생명들. 아마 농부만이 그걸 제일 잘 아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게 행복이죠.’

 “난 이 마을에서 태어나서 평생 떠나본 적이 없어요.”
 그 세월이 80여 년이라고 합니다. 흙냄새 맡으며 뜨거운 땀방울을 어지간히도 흘렸고 손가락 마디마디는 굵어졌지만, 부지런은 평생의 습관이 돼 몸을 가만두지 못합니다. “아이고, 덥다. 해 좀 피하자.” 그렇게 잠시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합니다. “나는 이걸로 여섯 일곱 명의 아이들을 키웠어요.” 아이들이 잘 컸나 봅니다. 아버지를 위해 근사한 집도 선물하고, 근심·걱정거리 덜어주는 걸 보면 말이죠.

 “고향살이가 제일 편해요. 물 좋고 공기 좋고 마음 편하고, 얼마나 좋아요. 난 평생 고향을 지켰지만 후회가 없어요.” 그리곤 은근 객지살이를 하다가 돌아온 친척들의 흉을 보기도 하죠. 어쩜, 시골에서의 흉은 곧 정(情)이기도 합니다. 관심을 가지는 것이고, 서로 보살피는 것이고, 바르게 살자는 것이잖아요. 흉 볼 것이 없는 삶은 얼마나 외롭고 삭막한가요. ‘그래요. 흉도 좀 보고 삽시다. 그렇다고 마음에 상처는 주지 말고요.’
가을이 물결처럼 퍼져 나갑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음지에서 양지로, 혹은 외지거나 구석진 곳에서 넓은 곳으로. 봄과는 반대 방향을 타고 흐르죠. 그래서 사람들은 가을이 오는 소리를 놓치기 쉽습니다. 만약 가을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면 다 망치는 것이죠. 대지도 황폐해지지만 사람들 마음은 더 황량해질 것입니다. 서서히 조심스럽게 가을을 마중해야죠.

 어느 집 돌담 아래에는 갖가지 꽃들이 흔들립니다. 과꽃, 접시꽃, 채송화,  코스모스, 맨드라미…. 들판 언덕에도 이제 구절초와 산국이 하얗고 노랗게 대지를 물들이겠죠. 아마, 그렇게 단장을 한 걸 보니 떠날 시간이 가까웠나 봅니다. 서서히 몸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는 거죠. ‘그래요. 홀가분하게 떠나게요. 또 만나잖아요.’ 가을이 흘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