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찬 방짜수저장
365번 이상의 두드림, 방짜수저
취재. 김아영 객원기자


 온 종일 망치질 소리가 끊이지 않는 김기찬 방짜수저장(강원 무형문화재 14호)의 공방. 쇠를 달궈 두드리고, 수 번의 담금질이 끝나면 모양을 잡아 깎고 다듬는 과정이 남는다. 쇠를 두드리는 횟수만 해도 365번 이상. 얇은 쇠칼로 모양을 잡다보니 하루에 한두 작품을 만드는 것도 버겁다. 우리나라 전통 수저인 방짜수저는 이렇게 정성스레 만들어진다.

 우리 선조들은 수저를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생명이 태어나거나 집안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수저 하나가 늘었다. 수저가 줄었다.’라는 말을 썼지요. 더구나 입 안에 들어가는 물건이다 보니 건강과도 연결을 시켰고요. 그런 의미가 있는 거예요. 수저는.”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방짜수저의 기술과 전통. 6대를 이어오면서 수저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식은 변했지만, 집안의 전통과 자부심은 그대로 이어졌다.

 “중학교 시절부터 아버지를 돕기 시작했는데, 정작 중요한 기술은 알려주시지 않았어요. 그 대신 나무를 깎고 아버지가 쓸 공구를 만들게 하셨지요.” 쇠를 만지게 한 것은 그 후로 한참이 지난 때였다. 방짜수저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도구부터 가마까지 스스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기본이 튼튼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모든 게 고루하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쟤가 제대로 된 수저를 못 만들 것 같다.”며 그를 걱정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방황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유명한 방짜유기 장인들을 찾아다녔지요. 다들 아버지가 만든 수저를 보곤 ‘요즘 세상에 그런 수저를 어떻게 만드냐.’며 고개를 흔들더군요. 그 때 마음을 잡았지요.” 문헌에도 나와 있지 않은 방짜수저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란 그.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웠다. 그 이후 산에 들어가 도를 닦듯 전통 수저를 복원한지 2년 째 되던 해, 제대로 된 방짜수저를 완성할 수 있었다.

 “구리 한 근에 주석 넉 냥 닷 돈이 정확한 비율로 들어가야 해요. 그래야 망치로 두드릴 때 터지지 않거든요. 칼질을 할 때도 느낌이 있어요. 주석의 비율이 높거나 낮으면 부드럽게 나가지 않고 손이 탁탁 막히지요.” 느낌을 모르면 이 기술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제대로 완성되지 않는다던 아버지. 바로 그 느낌을 안 것이다. 특히 방짜수저 제작의 최대 난관이었던 오른손 수저도 완성해 냈다. “지금은 오른손, 왼손 구분이 없지만, 우리 전통수저는 오른손 수저만 있요. 수저의 머리 모양이 안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는데, 그 균형을 맞추는 게 참 어렵지요. 방짜수저 기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오른손 수저를 완성함으로써 아버지의 바람을 다 이룬 것 같다고 말하는 그. 작년에는 그 기술을 인정받아 강원도 무형문화재에도 지정되었다.

 “지금도 수저를 만들면서 하나씩 알아가고 있어요. 이 일을 하면 할수록 선조들이 말한 방짜수저의 중요함을 알게 되지요.” 수저의 주인이 몸이 안 좋을 때면 색깔이 시커멓게 변하는 방짜수저. 입안에 생기는 균을 없애 입병을 낫게 하고 식중독을 예방하기도 한다. 그래서 평생 주인과 함께 숨 쉰다는 ‘살아있는 쇠’. 그것을 다루는 그의 자부심이 높고 단단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런 기술을 후손에게 알려줘야 하는데, 배우기가 어렵다보니 얼마 못 버티고 나가버린 사람들이 많아요. 많이 아쉽지요.”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기술전수에 게을리 할 수 없다는데…. 방짜수저에 대한 자료를 만들고 전통 수저를 재현해 내는 것이 지금 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단다. “전시관을 준비하고 있어요. 이를 통해 방짜수저를 알리고 기술을 지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저의 바람이에요.”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