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의 <옥추경> 해석과 ‘옥추경 기도’
글. 이정재

 앞선 호에서 언급했던 김영신이 기억해낸 마지막의 것(김3.)은 옥추경 <지도심요장> 부분으로 허시성의 해석을 빌어 현대어로 옮겨 옥추경의 이해를 구해보자.

‘천존이 말씀하시대, / 도는 정성으로 들어가고 / 묵묵으로 지키고 / 부드러움으로 쓰나니 / 정성을 씀에 어리석은 것 같고 / 묵묵함을 씀에 어눌한 것 같고 / 부드러움을 씀에 졸렬한 것 같으니 / 무릇 이와 같이 한즉 가히 몸을 잊고 / 가히 나라는 존재를 잊고 / 가히 잊었다는 것도 잊을 것이니라.’

 이 부분은 대산 종사 법문집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부분이다. <대산종사 법문집> 5집 제2부 연도수덕 9 옥추보경 편에 옮겨놓은 ‘옥추보경의 요점’은 옥추경 제7장 <도이성입장>과 그대로 일치한다. 이 장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 상략 … 도가 천지에 있으나 / 천지도 알지 못하고 / 유정과 무정이 오직 하나요, / 둘이 아니니라.’

 유정 무정 일여의 법문은 대종경은 물론 정산과 대산의 법문집에 두루 나오는 개념이자 동일 근원의 사상이다. 천도품 15장에서는 그 핵심적 설명을 하고 있다. 이외에 초기교서 <수양연구요론>에도 인용된 부분이다(<수양연구요론> 제1 정정요론 상).

 대산의 법문집에는 도이성입장 해석에 이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 옥추경-도교의 경문, 수양연구요론, 기도문-중앙단원
불교의 정수를 반야심경이라고 한다면, 도교의 정수는 이 옥추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종사님 당시 옥추경을 많이 말씀하셨다.’

 수양연구요론의 언급은 이것이 옥추경과 관련된다는 의미의 표시인 듯하다. 필자의 눈에 띄는 부분은 밑줄을 그은 ‘기도문-중앙단원’이란 부분이다. 이것은 중앙단원으로 옥추경 기도를 할 때 소태산으로부터 받았던 기도문이란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산도 이미 옥추경 기도를 했었음을 의미한다. 소태산으로부터 받은 중앙단원의 기도문이었음을 표시한 것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대산의 서술은 부분적으론 노트 정리하듯 간단명료한 요약이 더러 있다. 이 부분은 여기에 해당되며 김영신이 외웠던 옥추경 천경 부분과 일치하고 있다. 대산도 김영신처럼 옥추경 기도를 적극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법문집의 내용을 보면 그 누구보다도 기도의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앙단원으로서의 대산의 기도문은 같은 중앙단원이었던 이공주와는 달랐고, 김영신이 외웠던 부분과 일치한다. 김영신이 대산과 같이 중앙단원의 기도문을 받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추정컨대 사람마다 상황에 따라 해당 기도문이 다르게 할당되었던 점은 확실하다.
 대산의 경우 옥추경 풀이에서 ‘옥추경 기도를 했다.’는 적극적인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밑줄 그은 정도의 표기로 이를 인정하고 있다는 정황은 충분히 포착할 수 있다.

 옥추경 기도는 불법연구회 초기에 영광과 익산은 물론 경성에서까지 널리 알려지고 활용되었다. 그러나 그 기록에 있어서는 소홀히 했던 흔적이 있다. 특히 이공주의 것이 그랬다. 그런 중에 김영신의 그에 대한 짧은 언급은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둘은 모두 옥추경 기도를 한 점에서 같지만 두 기록이 보여주는 차이는 크다. 이공주의 것은 소태산에게서 받은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가 이를 옮겨 적은 것이고, 김영신은 머릿속에 암기하고 있던 것을 풀어낸 것이다.

 김영신은 기억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즉 ‘옥추경 기도’를 했다는 기억을 명시하고 있음에 반해 이공주는 옥추경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고 대산은 그 중간에 해당된다 하겠다.

 나이가 지긋이 드신 교무님들의 기억에 의하면 선진과 불법연구회 회원들의 활동기에는 이 옥추경 기도에 대한 일이 익히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기록에서 빠지고 한편으로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경향도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이 옥추경이 무당들이 즐겨 사용하는 경이니 이를 꺼려 그랬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가 이공주의 옥추경명 누락으로 이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이런 사정은 이공주의 경우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옥추경은 교단에서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의견도 있다. 즉 아무리 무당들의 경책일지라도 교단 초기 방편 교화의 수단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이해시키면 될 것을 굳이 감추고 숨길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일견 타당한 생각이다. 어느 회상이든 초기의 미미한 단계는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신의 길이 정당하다면 굳이 이를 떳떳치 못한 것으로 여길 필요는 없었던 것이 아닌가. 과거 문자와 지식의 차이가 컸을 때는 장엄 격식을 위해 다소 방편을 사용하였던 경우가 있었고 이 과정에 왜곡과 첨삭이 빈번했다. 그러나 지금은 원불교 스스로 주장하는 바 처럼 열린 대명천지의 시대가 아닌가.

 필자는 옥추경의 유래와 사상성에 대한 문제를 이전에 다룬 바 있다. 옥추경이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경’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설령 무당들이 보았다고 해서 그 경의 위상이나 사상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도문(道門)계에서 가장 경계해야하는 것은 선입견과 편견이 아닌가. 그리고 이 경은 무당만 보았던 경이 아니다. 조선대 내내 나라를 걱정하고 미래를 걱정하던 선지식들이 수지독송하던 소중한 경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음성적으로 유행된 경이었다.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는 지경에 이른 것도 이 경을 읽다 귀신에 들렸던 바와 무관치 않다(혜경궁홍씨, <한중록>). 그 결과 이 책은 다시 한번 금서(禁書)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소태산은 이런 선입견과 무관하게 그 경의 진정성을 알아봤고, 그 진정성에 따라 스스로 구도하고, 제자 수행에도 활용하였던 것이다.

 한편 <보경육대요령>과 <삼대요령>이 나온 뒤에는 공식적인 교과서로 채택되면서 옥추경 기도가 수면 아래로 잠적하여 옥추경의 잊혀짐을 초래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명쾌한 답이 되지 못한다.   

 이공주의 경우 총부로 오기 전 1928년 이내에 드렸던 경성 기도와 관련이 있다. 김영신의 공회당 기도 역시 그 이후로부터 1933년까지의 일이다. 불법연구회의 정식 교서라 할 수 있는 <육대요령>과 <삼대요령>이 1932년과 1934년에 걸쳐 연이어 출판되었으니, 옥추경의 사라짐이 이와 무관하다고만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그 언급을 회피한 것이 정당했다는 평을 받기도 어렵다. 더구나 교서가 발간된 이후에도 옥추경 기도를 진행했었다는 기록이 더 있었다면 더더욱 그렇다. 선진 이춘풍의 여식 이경순이 진행했다고 하는 ‘옥추경 기도’ 역시 여기에 해당된다(추후 다루기로 함).

 언제 옥추경 기도가 중단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무튼 이 기도는 초기 선진들의 정신무장 여하와 무관치 않고, 초기 교단의 결속력 강화가 이루어지기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아울러 구인기도와 관련이 있는 점을 들 때 좀 더 분명한 서술이 요구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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