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튀기 외상

글. 김옥남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온 지 일주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동네 분위기도 살피고 지리도 익힐 겸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었죠. 집 앞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유모차에 타고 있던 딸아이가 외치더군요.

 “엄마, 뻥튀기! 뻥튀기!”
 그러고 보니 맞은편에 뻥튀기 트럭이 한 대 서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엄마 이거, 이거.” 하면서 아이는 빨리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어요. 아이의 재촉에 일단 3,000원짜리 한 봉지를 집어 들고 지갑을 열었는데 이게 웬일인가요. 지갑 속엔 달랑 이 천 원밖에 없었습니다. 속으로 ‘1,000원을 깎아 달라고 할까, 아니면 외상?’ 잠깐 고민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뻥튀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어요. 얼핏 봐서는 아저씨 같기도 한 뻥튀기 아주머니 인상이 좀 무뚝뚝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빨리 달라고 보채는데 차마 깎아달라는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 망설이던 그때였어요.
“애기 엄마~, 돈은 다음 주에 줘도 되니까 오늘은 그냥 가져가요.”
“네? 저 오늘 여기 처음인데요…. 그럼 혹시 몇 시까지 하세요? 돈이 조금 모자라는데 이따가 다시 올게요.”
“아~ 아니에요. 애가 빨리 달라는데 그냥 가져가시고 다음 주에 주세요. 수요일마다 여기 오니까요.”
“네? 그래도 어떻게 그래요….”
“정말 괜찮으니까 다음 주에 주세요.”

 저는 일단 급한 대로 2,000원만 드리고, 금방 집에 들렀다 오겠다며 뻥튀기를 아이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초면에 외상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아주머니는 정말이지 ‘괜찮은’ 표정으로 다음 주에 받으면 된다고 하시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저는 단 몇 분이라도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 불편해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현금을 갖고 나왔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3,000원을 더 내고 뻥튀기를 하나를 더 사서 다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죠.

 만약 그 자리에서 천원을 깎아준다고 하셨다면 그 순간엔 횡재다 싶었겠지만 이토록 두고두고 기억에 남지는 않았겠지요. 처음 보는 저를 믿어주시고 아이 마음을 먼저 헤아려 괜찮다고 배려해주신 아주머니의 한마디에 저는 그만 이곳, 매주 수요일마다 뻥튀기 아주머니가 오시는 우리 동네가 좋아지고 말았습니다.

 

히말라야 트래킹

글. 구남혁


 7월 29일 트래킹 1일차. 우리는 포카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창밖으로 안나푸르나가 보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다시 차로 두 시간 이동 후 산에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우리를 반겨주는 것은 온통 진흙. 신발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점심도 입에 맞지 않았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 길에는 비가 많이 내렸고, 우비를 입어야 했다. 중간에 길이 막혀서 왔던 길을 되돌아와 출렁다리를 건넜다. 첫날이라 많이 힘들지 않아 속도를 낸 덕분에 로찌(숙소)까지 두 시간이 못 걸렸다. 잠자리에 눕자 내일 산에 또 오를 생각에 눈앞이 막막해졌다.

 7월 30일 트래킹 2일차. 비가 와서 인지, 정말로 힘들었다. 순간순간 ‘여기서 내려갈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 같아서 참고 올라갔다. 그렇게 힘들게 올라간 고래파니에 있는 로찌는 호텔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좋았다.

 7월 31일 트래킹 3일차. 푼힐에 오르는 날이다. 드디어 해발 3,000미터를 넘어섰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힘들게 올라간 후 몇 분을 쉬고 나면 머리 아픈 것이 금방 괜찮아졌다.

 8월 1일 트래킹 4일차. 촘롱을 가는 날. 오늘의 점심 메뉴는 김치찌개다. 우리가 평소 먹던 맛과는 달랐지만 오랜만에 먹는 한국음식이라 많이 먹었더니 배가 아파서 산을 오르는 동안 고생을 했다. 그날 저녁 숙소에서 가족들과 통화를 했다.

 8월 3일 트래킹 6일차. 드디어 마지막으로 산에 오르는 날이다. 아침을 먹고 M.B.C로 향하는데 고산병 때문인지 머리가 아프고 손발이 저려왔다. 일정 중 가장 힘들었다. 저녁을 먹은 후 전망대에 있는 박영석 외 2인 추모비에 도원교당 배너(‘도원의 도전(열정)! 교단의 희망’)를 걸고 일원상 서원문 독경으로 추모를 했다.

 8월 4일 트래킹 7일차. 아침 일찍 추모비 앞에 다시 올랐다. 그곳에서 설산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내가 정말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들이 멀리 있어 별로 높아 보이지가 않기에 엄마에게 “우리가 올라온 만큼만 올라가면 되겠는데?”라고 말했다. 엄마는 한참 웃었다. 드디어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8월 6일 트래킹 9일차. 드디어 산에서 완전히 내려오는 날. 처음엔 쉬운 듯하더니 이내 오르막길이 나오고, 나중에는 늪지대까지 나타났다. 늪지대를 지나면서 지난 8일 동안 산에서 물린 거머리 보다 더 많은 거머리들에게 물렸다. 산에서 내려온 후 지프차를 탔는데, 어찌나 흔들리던지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9일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설산을 본 것이 정말 좋았다. 네팔 출신 원성제 교무님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교당과 김양진 교무님이 아니었다면, 평생 이런 여행을 다녀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까?

 

감사는 감사를 낳는다

글. 임은우


 ‘왜 자꾸 이런 일만 일어나는 거야!’ ‘이러다 내가 정말 잘 될 수 있을까?’ 최근까지 머리에서 떠나지 않던 생각들. 그간 난 매사에 불평했고 부정적이었다.

 그럴 법도 한 게 일 년이 넘도록 원하던 꿈을 이루지 못했고, 돈이라도 벌기 위해 지원한 곳에서도 번번이 떨어지며 취업 문턱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함과 좌절감은 커졌고 지속된 실패로 스스로를 원망했다. 빛나던 꿈은 자책으로 흐릿해져갔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꿈을 포기하고 있었다.

 집에만 박혀 살던 어느 날, 돌파구가 될 행복은 햇살처럼 다가왔다. 출산 후 중요한 일이 생긴 누나의 요청으로 당분간 조카를 돌봐주기로 한 것이다. 갓난아기 조카와 시간을 보내다보니 그동안의 아픔을 보듬을 수 있을 만큼 품이 넉넉해졌다. 특히 누나가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과 대하는 말투에서 부모님께서 내게 주셨던 사랑이 떠올랐다. 항상 뒤에서 말없이 든든하게 나를 받쳐주신 부모님…. 스스로 자책하며 꿈을 포기하려한 내가 바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심신이 많이 약해지신 부모님인데, 이제 내가 버팀목이 되어드려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시 혼자가 된 후 난 생활을 바꿔나갔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주체적으로 포용하며 감사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기로 했다. 비록 억지스런 면이 없진 않았지만, 놀랍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효과가 컸다. 일상의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 다가온 것이다. 세탁소 이모님이 옷을 깨끗이 세탁해주셔서 감사했고, 택배 기사님이 물건을 가져다 주셔서 감사했다. 자연스레 웃을 일도 많아졌다.

 내가 감사함을 느끼게 된 계기는 전혀 거창하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다. 단지 마음을 새롭게 먹었을 뿐이다. 혹 누군가는 “어떻게 모든 걸 감사 할 수만 있어?”라며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감사해 할 때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그 속에서 작은 것 하나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삶이 감사함으로 바뀌면서 고마운 기회는 덤으로 찾아왔다. 내가 바라던 곳에서 면접을 보게 된 것이다. 매번 갖지 못해 아쉬웠던 기회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혹 면접에서 다시 떨어진다 해도 이젠 괜찮다. 물론 아쉽긴 하겠지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과 면접까지 갈 수 있도록 노력한 내게 감사하다.

 일단 미운 마음과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가만히 눈을 감아보자. 그리고 고마운 것들을 떠올려보자. 분명 생각보다 많은 얼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사는 감사를 낳으며 퍼져나갈 것이다.

 이렇게 뒤돌아보니 항상 내 곁에서 날 믿고 응원해준 많은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오늘 저녁은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안부를 여쭤야겠다. 소중한 사람들의 사랑에 나도 따뜻한 정으로 보답하고 싶다.

 

아홉수

글. 김준영


 예로부터 사람들은 나이에 숫자 ‘9’가 있으면 결혼이나 이사를 꺼렸다고 한다. 앞자리가 바뀌는 새로운 ‘10’을 준비하기 위해 ‘9’라는 숫자에 해당한 1년 동안은 큰 변화를 삼갔다. 이를 ‘아홉수’라고 부른다.

 미신일 수 있겠지만, 내 나이에 숫자 ‘9’가 들어간 해 역시 유독 힘들었다. 9살 때는 이사로 인해 갑작스럽게 전학을 가게 되어 친구들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고, 19살 때는 우리나라 모든 고3들이 그러하듯 내신과 수능의 고통을 견뎠다. 그리고 29살이 된 올해 초, 나는 진로에 대해 고민했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갈수록 심해지는 취업난을 뚫고 다니게 된 회사였고, 극작과를 졸업한 후 내가 꿈꿔왔던, 스토리텔링을 통한 도시 브랜딩이나 전시기획을 하는 곳이었다. 더욱이 그쪽 업계에선 10년간 탄탄히 입지를 다진 기업이어서 나는 그곳에서 경력만 잘 쌓으면 됐다. 겉으론 보기엔 너무나 완벽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인턴이 끝나는 3개월이 지나가던 시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비가 왔고, 늦게까지 잔업을 처리한 후 퇴근하는 길이었다. 밤 10시가 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빌딩마다 켜져 있는 불들은 꺼질 줄 몰랐다. 그 아래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차도를 오가는 차들처럼 차가웠다. 흘러가는 시간을 눈으로 보면 이런 광경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동안 외면하던 고민이 소리 없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살아가면 과연 행복할까?’

 누가 뒤에서 따라오기라도 하듯 숨 가쁘게 돌아가는 도시에서 나는 잠시 멈춰 생각했다. 가슴이 답답했고, 빗물에 젖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나를 스쳐 가는 사람들은 모두 비를 피하기 위해 우산을 들고 있었다. 29살의 나처럼, 숫자 ‘9’를 손에 쥔 저들 역시 큰 변화를 삼가는 아홉수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게 나의 미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웠다.

 지금 나는 홍대에 있는 의류매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남이 아닌 나를 기준으로 생각하니 답은 쉽게 나왔다. 어릴 적부터 관심은 많았지만 늘 현실 앞에서 외면하던 것은 ‘패션’이었다. 이곳은 일반적인 매장과 다르게 세일즈뿐 아니라 직원들이 직접 VMD(visual merchandiser)나 스타일링 작업을 하여 ‘패션’에 대한 다양한 일을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전보다 급여는 적지만 하루하루 재미있고 마음이 편하다. 예전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남는 시간에 글 작업도 틈틈이 하고, 지금은 웹툰 스토리작가로 연재예정 중에 있다. 이 모든 게 그날, 도시의 풍경을 보고 생겨난 일들이다. 생각해보면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다. 나와 같은 이 세상 모든 ‘아홉수’들에게 응원의 말을 보내고 싶다. 행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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