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음식 좋은 손님의 어울림, 분식집
인생의 맛이 담긴 레시피
취재. 이현경 기자 

 정확한 주소나 가게 이름이나 전화번호가 없는 곳.
심지어 메뉴판도 없다. 가게 근처에 있는 ‘서흥하이퍼마켓’을 기점으로 이곳을 찾았다. 호우경보가 내린 아침이었다.

 유경희 씨는 평소보다 2시간이나 서둘러서 가게 문을 열었다. “비 온다고 장사 안 하고, 춥다고 장사 안 하면 어떻게 해?”라는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힌다. “우와 비 참 많이 오네.”라는 감탄도 잠시. 빗줄기가 쉴 새 없이 떨어지는 파란 천막 지붕 아래로 판을 덧대 물길을 낸다. 가게 밖의 큰 고무대야엔 아까부터 빗물이 넘쳐흐르고 있다.

 백색소음 속 분주히 가게 안을 오가는 움직임만 보인다. 그러자 치열한 생활터전인 이곳의 소리에 오히려 귀 기울이게 된다. 조리 기구가 덜그럭거리며 부딪히는 소리, 뜨거운 가스 불에 보글보글 떡이 삶아지는 소리, 소리 없는 바쁜 발소리 등에서 이상하게 평안과 안락이 느껴지는 풍경. 민첩하면서도 여유 있는 모습으로 떡볶이를 만드는 유 씨의 마음이 반영돼서일까?

 “사십이 안 돼서부터 장사를 시작했어. 그때 전농동에 살았는데 집에서부터 이 근방(휘경동)까지 리어카를 끌고 왔었지.”라는 말과 함께 마치 전래동화와 같은 이야기보따리가 펼쳐진다.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시작한 일. 그 시절엔 떡볶이와 순대가 지금처럼 대중화되어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린아이들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이 일을 한 지 올해로 25년, 이곳에 정착한지도 벌써 7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유경희 씨는 곧 칠순 잔치를 앞두고 있다.

 “그때는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지. 다른 데로 옮기지도 않고 이 동네에서만 장사했어.”라는 말마따나, 유 씨와 손님 사이의 대화는 ‘안녕하세요?’라는 격식 차린 인사말보다 툭툭 근황을 건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만큼 도탑게 알고 지내는 동네 주민과 단골손님이 많다는 증거일 터. 그녀가 자주 마켓 사장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는 이유다.

 그러나 무엇보다 손님들이 이곳을 찾는 더 특별한 이유는 ‘직접 만든’ 순대와 떡볶이 때문이다. 떡볶이에 사용되는 육수와 다진 양념은 모두 그녀만의 비법. 청양고추를 넣은 순대도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다. 새콤하면서도 깔끔한 뒷맛을 가진 떡볶이와 매콤하면서도 쫀득한 순대는 묘한 중독성을 갖고 있다. 좋은 음식이 좋은 손님들을 부르는 것이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친구가 방문했다. 구리에 사는 십년지기 친구 박미숙 씨. “좋은 사람이에요. 엄청 편안하고 정도 많고 생활력 강하고…. 아휴 너는 상 줘야 해!”라며 엄지를 치켜세우더니 유 씨를 ‘똑순이’라고 지칭한다. “애들도 속 한번 썩이지 않고 참 착해요.”라는 박 씨의 말에 유 씨가 아들 얘기를 꺼낸다. 건설 회사에 다니는 똑똑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은 작년부터 출근 전에 어머니의 순대를 만드는 일을 돕는다. 반죽에서부터 내장을 삶는 것까지 직접 같이한다. 그야말로 모자(母子)의 정성이 듬뿍 담겨있는 것이다.

 아침에 만든 떡볶이를 다 팔고, 다시 또 만들기를 두어 번째. 이곳의 떡볶이는 재료에서부터 조리과정까지 다른 가게와는 많이 다르다. 한쪽 구석에 있는 가스 불 위에서 끓고 있는 뽀얀 육수에 떡을 넣어 1차로 양념이 배게끔 약 10분 정도 끓이다 보면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하얀 떡볶이’가 완성되는 것. 매운맛만 없을 뿐이지 빨간 떡볶이와 똑같은 맛이 나는 이 떡볶이는, 매운 걸 못 먹는 아이들에게 특히 인기가 좋다. 마침 어린 학생들이 고사리손으로 천 원짜리 한 장을 내밀며 하얀 떡볶이를 주문한다. 12살 소녀들은 길가로 나가 팔을 휘젓더니 다시 가게 앞으로 돌아와떡볶이를 먹는다. 바깥보다 높은 가게 온도 때문이다.

 비가 그치면서 더 뜨거워진 태양과, 가까이에서 이글거리는 가스 불이 더해지자 가게 안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다. 4대의 선풍기가 고개를 바르르 떨며 쉼 없이 날개를 돌리는 동안 그녀는 쉴 틈이 없이, 떡볶이에 육수를 넣으면서 불 조절을 한다. 깔끔한 성격 덕에 수시로 매대를 닦는 일도 반복한다.

 직접 만두를 튀기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깨끗한 기름을 사용해 처음엔 센 불에서 튀기다가 은근하고 약한 불로 튀기는 게 기술이다. 타닥타닥 기름이 끓는 소리에 절로 흥이 난다. 그 사이마다 방문한 손님들은 박자에 맞게 가사를 읊조리듯 메뉴를 주문한다. 다시 또 학생들이 온다. 유 씨는 그릇에 푸짐하게 빨간 떡볶이를 담고는, 두 손으로 튀김 만두를 뚝뚝 끊어 서비스로 올려준다. 날이 조금 더 선선해지면 더 다양한 튀김을 내놓을 예정이다. 이곳의 별미인 참기름을 듬뿍 넣고 직접 만든 김말이를 곧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울림’이란 단어가 마음을 스친다. 메뉴가 어우러지고, 손님들이 어우러지고, 이곳에 모이는 그녀의 친구들도 서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그녀는 내일도 오전 6시에 일어나서 머리를 단장하고 가게 문을 열 것이다. 도대체 지난 세월 동안 어떤 마음들을 겪었길래 이리도 여유와 배려가 넘치는 걸까. 자꾸 물음표가 생긴다. 인생의 맛, 그 레시피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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