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김지수 교무

 새해를 맞이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해 겨울은 영산 성지에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미리 가지치기를 하지 않은 나무들이 폭설에 푹푹 쓰러지거나 가지가 부러졌다. 정관평, 대각지, 구간도실을 순례한 후, 고요한 영산 성지의 밤…. 그 밤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다음날 새벽에 눈이 많이 쌓인 길을 총총히 올라 영산선학대학교 법당에서 좌선을 했다. 그리고 아침에 편입 지원서를 썼다. 

 이십대의 막바지에 삶의 대반전이 일어났던 그 날 아침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그 대반전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출가를 할지, 말지.’ 여러 해 동안 우유부단하게 고민한 끝에, 내심 ‘이번이 마지막 결정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영산 성지를 찾아갔다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만약에 여자 예비교무들에게만 요구되는, 입학 전에 정녀지원서를 미리 제출하게 하는 제도만 없었더라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줄이고 더 일찍, 더 쉽게, 출가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날 이후로 10년이 훌쩍 넘었다. 하지만 내게 출가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다. 매일 매일의 삶이 출가 감상담이다. 한 번의 선택으로 이 길에 들어섰다고 해서 그냥 저절로 쭉 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출가라는 것이 어떤 특정한 삶의 방식을 의미하거나 하는 일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오직 ‘마음’에 있음을 알아가고 있다. 

 故 법타원 김이현 종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다. “전무출신을 잘 하려면 타력을 잘 빌릴 줄 알아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록새록 새겨지는 말씀이다. 어려운 경계들이 있을 때마다 지켜봐주고 묵묵히 응원과 후원을 보내주는 가족들과 법연들, 그리고 법신불 사은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제대로 갈 수 없는 길이 출가인 것 같다.

 살면서 만나는 많은 인연들과 서로에게 큰 힘이 되는 상생 선연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죄송하게도 서로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인연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시행착오들과 인연들이 나를 키워주고, 깨우쳐 주고, 단단하게 해주고, 때로는 시험에 들게도 해주고 있다.

 ‘출가’하기 전의 나를 돌아보면, 세상 물정에 좀 어두웠던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의 욕심에 덜 물들었던 순수한 마음이나 정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같다. 우리 교법이 참 훌륭하다는 믿음이 있었고, 이 법을 깊이 공부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 회상에 기여하면서 살면 좋겠다는 순수한 바람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불법과의 깊고 지중한 인연이 심어져 있었기에, 마침내 시절 인연이 무르익어서 싹을 틔우고, 지금의 삶으로 나를 인도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 시기에 안내자 역할을 해주신 감사한 법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출가! 무거운 사명감보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행복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아가고 싶다. 그리고 이 출가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나도 소망한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초임지의 역경도 공부의 기회
김성곤 교무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면서 학교 행사나 축제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했다. 그런 나에게 친구들은 “넌 연예인이 될 거야.”라는 확신을 주었다. 나 역시 무대에 서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런데 연극영화과를 준비하던 고등학교 시절, 원불교와의 만남이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생겼다. 수원교당에서도 어김없이 끼를 발휘하고 지내긴 했었지만, 출가는 꿈에도 생각지 않던 일이었다.

 고3이던 어느 날.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친구를 출가의 길로 꼬시게 도와달라는 교무님의 요청에 의해 옆에서 말을 거들며 맞장구를 쳐주다 보니 출가의 삶이 굉장히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내가 가진 끼와 재능으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가장 컸다.
사실 오래 전부터 나의 마음 한 편에는 ‘연예인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막연한 관념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알게 모르게 갈망했던 ‘공부’가 ‘마음공부’임을 확인한 것은, 원불교학과에 다니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예비교무 수학시절, 교무님들이 여러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많은 훈련과 법회, 행사에서 내가 가진 끼를 마음껏 펼쳐보였고 좋은 호응을 받았다. 즐겁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한번은 전주 한옥마을에서 길거리 공연에 참여했던 모습이 동영상으로 담겨 ‘한옥마을 휘성’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SNS에서 이슈가 됐었다. 누군가 ‘원불교 예비성직자 클라스’라고 달아 준 댓글은 자부심이 되었다.

 그렇게 지내온 10여 년의 수학기간이 끝나고 첫 발령에 대한 설렘을 안고 있던 지난겨울. 설레는 마음으로 확인한 나의 첫 발령지는 ‘완도청소년수련원’이었다. 충격이었다. 원칙적으로 신규 교무는 교당으로 발령이 나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다른 교무들과는 조금 다른 특성을 갖고 있고 또 남달리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도, 이곳에서는 평범한 구성원 중 하나에 불과한 것 같았다. 업이라고 생각하라는 교무님 말씀은 위로보다 상처로 다가왔다.

 인수인계가 조금 이르게 이루어지면서 1주일가량 훈련원에서 혼자 지냈던 기간은 패닉 상태의 연속이었다. 식당방에 처박혀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일주일을 보낸 후, 원장님과 청소를 했다. 그리고 그 뒤에 오신 덕무님, 교도님과 함께 훈련원을 재정비하며 마음을 살려내기 시작했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상황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로가 쌓이는 현실에 휘둘리다보면 짜증도 나고 우울함도 느낀다. 출가라는 삶이 쉽지 않은 것임을, 그 어느 때보다도 체감한다. 그렇다고 현실에 속아 ‘공부’를 놓아버리면 정말이지 남는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나에게 “앞으로 교단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깨달음이 없는 종교는 쓸모가 없듯, 대종사님께서 밝혀주신 일원대도 공부가 없다면 그 어떤 좋은 교화 현장에 가더라도 의미 없는 삶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렇기에 지금 주어진 초임지에서의 역경이 무엇보다 소중한 공부의 기회라고 생각하며, 오늘도 자기 전 염불에 마음을 깨워본다.


행복하다, 다행이다, 행운이다
김서윤 예비교무

 나는 원불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지평선중학교에 다니며 원불교를 처음 알았고, 그 후 영산성지고등학교에 다니며 입교했다. 타고난 성격이 무덤덤하고 크게 모난 부분 없이 무난해서 그때부터 전무출신에 대한 얘기와 권유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면도 있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나, 대중 앞에 서는 일이 어렵고 부담스러웠다. 또 스스로 성직자를 할 만큼의 서원이나 신심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전무출신을 하기보단 오랫동안 꿈꿨던 만화가나 소설가가 되고자 했다.

 그 무렵 할아버지께서 열반하셨다. 장례를 원불교식으로 치렀는데, 그때 빈소에서 독경하시는 교무님들의 뒷모습을 보며 ‘저런 삶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렴풋하긴 했어도 그게 출가서원의 싹이었던 것 같다.

 상사원에서 간사근무를 할 때는 내 역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원불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만큼 교리를 알기 위해 <원불교전서>를 많이 읽고 공부하고 실천하기에 공들였다. 주경야독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큰 스승님을 모시고 함께 지냈던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영산선학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성지의 기운을 느끼며 교리를 더욱 깊이 공부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성격을 고치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내가 전무출신을 하기엔 서원과 신심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더 빚지기 전에 그만두어야겠단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주변 인연들의 보살핌과 조언 덕분에 무사히 졸업을 했다.

 대학원 입학 후 3월에 관례식을 치르고 교무 외형을 갖추었는데, 머리를 올리는 게 불편하고 생산적이지 않아보였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처음엔 머리 올리는 데만 30분 이상이 소요되어서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머리를 올렸을 때의 단정한 모습이 괜찮게 느껴졌다. 여자 교무가 교단의 자부심이라고 하셨던 선진님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실습은 추천교무님이 계신 익산교당에서 했다. 교화현장을 체험해 본 적이 없기에 막연하고 어렵게만 생각했는데 어린이·학생들과 어울리고 교당 일과 의식을 진행해보니 부담감이 많이 덜어졌다. 교무로서의 사명감과 책임감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남은 수학기간 동안 꾸준히 교무로서의 능력을 함양하는데 공들일 예정이다. 의식집례도 해보고, 기도와 좌선에 공들일 것이며, 특히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사리연구 공부에 노력할 생각이다. 처음엔 교화보단 글과 그림을 주로 하는 교무가 되고 싶다는 어렴풋한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대종사님의 법과 뜻을 온전히 받아 실행하는 전무출신이 되고 싶다. 처하는 곳마다 만나는 인연들에게 불공을 하고, 함께 진급하는 상생의 인연을 맺고 싶다. 가끔 원로교무님들께서 “이 법을 만나 행복하다, 다행이다, 행운이다.”라는 말씀을 하시곤 한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여전히 부족함이 많지만 훗날 ‘이 법을 만나 행복하다, 다행이다, 행운이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전무출신이 되고자 한다.


내 서원은 청소년교화
백준석 예비교무

 내 출가의 계기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있었던 어떤 일 때문이다.
 당시 선생님들께선 학생들의 진로 상담에 한참이었다. 성적과 꿈에 맞게 어느 대학, 무슨 과를 갈지, 전형은 무엇으로 할지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친구들이 하나 둘 불려갔고 나도 내 차례를 기다리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학생들의 성적에 따라 선생님들의 상담 자세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대해주거나 1:1 지도까지 해주면서,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은 먼저 챙겨주지 않고 관심도 갖지 않으셨다. 나는 그게 차별이라고 느꼈고, 분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당시 내 꿈이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소통하며 꿈을 키워주고 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일로 선생님이란 직업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어머니께 고민을 털어놓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머니께선 원불교 신앙에 대한 신심이 깊으셨고, 전무출신 얘기를 꺼내셨다. 생각해보니 어머니가 원불교를 다니면서 항상 바른 삶을 살고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인정을 받으시는 모습이 떠올랐다.
관심이 생긴 난 전무출신과 원불교에 대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던 중 청소년 교화를 할 수 있단 말을 들었다. ‘이 길이라면 선생님이 아니더라도 아이들과 소통하며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동원에서의 간사근무는 모든 것이 낯설고 경계거리였다. 화가 나면 교무님들께 대들기도 하고 산 속으로 달려가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모든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원장님 이하 교무님들께선 내 모습을 이해해주시고 스스로 변화할 때까지 기다려주셨다. 그렇게 간사 1년차 후반쯤 됐을 때, 나는 지난날의 내 모습을 뉘우치기 시작했다. 출가를 했음에도 그전과 변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크게 반성했다. 그때부터 변화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안 좋은 습관을 이겨내려고 애썼다. 덕분에 간사 2년차는 내게 무척 뜻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원불교학과에 입학한 후, 간사 2년차에 보냈던 시간이 오히려 아만심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주위 동기와 선배들을 내 기준으로 분별하고 시비를 가리기에 바빴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대종사님 법에 대조하며 조금씩 이겨가고 있다. 다행이다.

 교학과에 와서야 깊이 생각해보게 된 것은 ‘서원’이다. 그동안에는 누군가 “네 서원이 뭐냐?”고 물어보면 확실한 대답을 하기 어려웠다. 그게 ‘진정 내 서원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답은 의외로 명쾌했다. 나의 서원은 ‘청소년교화’다. 아이들을 좀 더 바른 길로 이끌어주고 소통하며 꿈을 키워주고 싶다. 구체적으로는 청소년 교화용 교전을 만들고 싶다. 대종사님 말씀을 조금 더 간결하고 쉽게 전달하는 청소년 교화용 교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전을 만들기 위해선 교리를 잘 알아야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대종경> 대의요지 공부를 하거나 교사를 읽는 등 차근차근 교리 공부를 하고 있다. 점점 내 서원이 구체화되는 걸 느낀다. 물론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간 충분히 실력이 갖춰질 것이고, 청소년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교전도 발행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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