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에 전법의 터전을 마련하신 뜻 - 불법연구회의 ‘근대’ 수용 -

글. 박윤철

 영산에서 회상 건설의 정신적·물질적 기초를 닦고, 다시 석장을 변산 봉래산으로 옮겨 5년여의 회상 공개 준비를 마친 소태산 대종사는 1924년 6월, 회상의 정식 공개에 즈음하여 “토지도 광활하고 또는 교통이 편리하여 무산자의 생활이며 각처 회원의 내왕이 편리한(<불법연구회창건사> 참조)” 전북 익산군 북일면 신용리 일대에 새 회상 원불교의 터전을 잡았다. 이번 호에서는 대종사께서 익산 신용리 일대를 회상 창립의 터전으로 선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꼽은 ‘교통 및 회원 내왕의 편리’라는 표현이 지닌 의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익산은 원래 인근 군산이 개항하는 1899년 당시만 해도 각지로 통하는 길다운 길이 없었다. 예를 들어 전주에서 군산을 가기로 하면 사람의 등이나 말에 짐을 싣고 전주천을 따라 덕진으로 나온 다음, 그 서쪽에서 상가리의 흙다리를 건너 동산촌과 대장촌을 거쳐 옛 이리 곧 지금의 익산역 근처에서 1박을 하고, 그 다음 날에야 군산에 도착하는 이틀 여정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통감부 시대가 개막되는 1905년 이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도로’ 개수 작업이 시작되어 1909년 10월에 폭 6미터의 ‘신작로’가 준공되었고, 1911년에는 현재의 익산시 목천포에서 김제를 잇는 도로가 개수되어 준공됨으로써 익산이 일약 신작로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전군도로’와 같은 신작로의 등장은 익산에 본격적으로 ‘근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신작로 이상으로 익산의 ‘근대’를 앞당기게 되는 사건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익산역을 중심으로 한 호남선과 전라선, 군산선의 개통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옛 이리(한글명 솜리)는 조선시대의 익산군 익산면에 속해 있던 아주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작은 마을에 철도역이 생기면서 익산면 이리는 이리읍으로 승격되고, 그 이리읍은 다시 이리시로 승격되었다가 현재의 익산시가 된다. 옛 이리가 현재의 익산시로 발전하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철도 개통 덕분이었다.

 호남선의 경우를 보자. 호남선은 1910년 통감부가 부설 방침을 결정하여 1912년 4월에 익산역 이북의 호남선과 익산역에서 군산역까지 이어지는 군산선이 동시에 개통되었다. 그리고 1914년 1월에는 익산 이남, 곧 익산에서 목포까지 이어지는 선로가 개통됨으로써 호남선이 완전 개통되었다. 한편 전라선의 경우, 1913년 1월에 부설 인가를 시작으로 1914년 2월에 공사 주체인 전북철도회사가 설립되어 부설에 착수, 1914년 11월에 익산과 전주를 잇는 ‘경편철도’(협궤철도)가 개통되었다. 이 경편철도는 1929년에 현재와 같은 광궤철도로 개량되었으며, 1931년에는 남원까지, 1937년에는 여수까지 전 선로가 개통된다.

 신작로 개통에 이은 철도의 개통은 익산을 일거에 ‘근대’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호남선 개통과 더불어 신축된 익산역(옛 이리역) 청사 2층에는 근대식 여관이 자리 잡아 여행객들의 숙소로 이용되었으며, 호남선 선로 공사가 한창이던 1911년에는 금마에 있던 익산 군청과 우편소(우체국)가 익산 시내로 이전하였다. 같은 해에 ‘근대’의 상징으로 꼽히고 있던 정미소가 시내에 ‘이마이(今井)정미소’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당시 정미소는 농업을 기간산업으로 하던 익산에 없어서는 안 될 근대적 인프라 가운데 하나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1914년에는 전라북도 최초의 극장 ‘이리좌’가 4백 석 규모로 시내에 영업을 개시하였고, 이어 1915년에는 첫 근대식 초등학교인 ‘이리보통학교’가 처음으로 개교하였다. 이어 1922년에는 ‘이리농림학교’(현재의 전북대 농대 익산캠퍼스), 1924년에는 ‘이리고등여학교’(현재의 이리여고) 등이 개교함으로써 교통과 통신, 교육과 문화 분야에 걸쳐 이른바 ‘근대’의 인프라 대부분이 익산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1924년 곧 원기 9년에 ‘불법연구회’라는 새로운 종교 공동체가 익산에 터전을 잡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인 ‘교통의 편리, 내왕의 편리’에 담긴 역사적 사실들이다. 요컨대, 회상 창립 당시 터전을 익산에 마련하게 된 데에는 소태산 대종사의 ‘정확한’ 시대인식, 다시 말해 도래하고 있는 ‘근대’를 정확하게 내다본 통찰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원불교는 ‘근대’의 종교였다. 원불교야말로 시대의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하여 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온 종교라는 말이 되겠다. 이 점에 대해 한 역사학자의 평에 주목해 보자. 일제 강점기에 원불교가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理想)과 그 구체적 실천사례를 꼼꼼하게 분석하여 일본 학계에 보고한 바 있는 재일(在日) 사학자 조경달 교수(일본, 치바대학교)는 소태산 대종사가 이끌었던 불법연구회에 대해 “불법연구회는 도시 지식인사회로부터도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근대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면, 조선일보는 ‘불법연구회는 재래종교의 형이상학적 신비적 형태로부터 완전히 탈각한 대중적 종교였다.’ 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식민지조선에 있어 불법연구회의 교리와 활동’,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67집, 2016, 293쪽)고 설명하면서, 원불교야말로 식민지시대에 철저한 자력구제와 사회공헌, 인류구원을 지향한 모범적 종교이자 ‘근대적’ 종교였다고 평가한 바 있다.

 이렇듯 ‘근대’ 종교로서 성공한 원불교가 이제 ‘탈근대’를 지향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여기서 ‘탈근대’는 ‘근대’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다거나, ‘근대’의 모든 것을 부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근대’가 성취했던 바람직한 것들은 계승하고, ‘근대’의 실현 과정에서 드러난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은 극복하여 새로운 차원을 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탈근대’ 시대의 원불교가 계속하여 ‘성공하는’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탈근대’의 시대적 특징을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하자. ‘탈근대’는 곧 ‘글로내컬’(Glo-Na-Cal) 시대를 말한다. ‘글로내컬’ 시대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삶이 지구적 차원(Global), 국가적 차원(National), 지역적 차원(Local)이라는 삼차원 연동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지구적 차원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는 것은 ‘북한 핵문제’의 근원인 남북분단이다. 그리고 지역적 차원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은 지역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풀뿌리’ 생태계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파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탈근대’ 시대의 원불교, 다시 말해 원불교 2세기를 맞이한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글로내컬’ 시대에 어떻게 창조적으로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 창조적 대응의 힌트를 ‘근대’의 도래를 내다보며 ‘근대’ 종교로서 멋진 출범을 알린, 1924년 익산에서의 회상 공개로부터 읽어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보람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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