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확 뚫리는 시원한 물김치

글. 김광원


 긴 가뭄 끝에 장마를 맞이했다. 뉴스에서는 호우주의보니 호우경보니 하며 전국 곳곳의 강우량 소식을 알린다. 아직은 폭우 걱정보다 가뭄 해소의 기쁨이 훨씬 크다. 충청도를 중심으로 농수 걱정에 식수 걱정까지 무척 크더니 말 그대로 나라 전체가 단비를 맞이한 것이다.
간밤에는 모처럼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아파트 고층에까지 왁자하게 들려왔다. 잠시 후 내 집 근처의 아중천에 나가 보면 냇물이 힘차게 흘러내릴 것이고, 모악산의 계곡들은 폭포수마냥 힘차게 쏟아져 내릴 것이다. 차를 타고 나가 생명력 넘치는 그 힘찬 광경을 보고 올까보다. 계속 이어지는 빗소리와 함께 온 들녘이 생명의 기운으로 푹 젖어 있으니 내 마음도 쾌적해진다.

 길고 긴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듯이 요즘 우리들 주변은 화기가 넘치고 희망이 가득하다. 얼마 전 우리 모든 국민들은 참 뜨거운 감동을 맛본 바 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빠와 엄마는 지금도 참 행복하게 살아 계셨을 텐데.” 5월 18일, 그 슬픈 생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고 돌아서는 서른일곱 살 김소형 씨를 문재인 대통령이 아버지같은 품으로 안아준 날.

 딸의 출생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광주에 올라온 갓난아이 소형의 아버지가 37년 전 계엄군의 총에 희생된 것이다. 출생의 기쁨이 한 가족의 비극으로 뒤바뀐 것이다. 이 어찌 한 가족의 비극으로만 그칠 일인가. 김소형 씨의 비극은 5·18을 겪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이 아니런가.

 문재인 대통령은 10년 동안 이어진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행사 때의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을 참으로 쉽게 한순간에 잠재웠고, 게다가 기념식 당일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읽고 쓸쓸히 돌아서는 김소형 씨를 뒤따라가 아버지 품으로 꼭 안아주었다. 이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국민이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하루 종일 먹먹한 가슴으로 보내야만 했다.

 한동안 먹먹해 있던 나는 불현듯 정읍 북면에서 따온 돌나물이 떠올랐고, 그래 오늘 같은 날 돌나물물김치를 담아보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얼마 전 스마트폰을 통해 돌나물의 효능을 검색하다가 돌나물물김치의 레시피를 언뜻 보았던 때문일까. 나는 주저 없이 모래내시장의 오후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길가에 앉아 있는 노점상 할머니들한테서 미나리, 배추, 오이, 실파, 생강, 당근, 청양고추 등을 사가지고 와서, 인터넷을 통해 돌나물물김치 레시피를 몇 번 들여다보고는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사온 것들을 숭숭숭 썰어 넣고 천연암반수를 몇 병 부어 넣었다.
여기에 또 밥 한 덩이 믹서기에 갈고, 멸치액젓도 풀고, 고춧가루도 대강 섞어주고, 양파에, 마늘에, 매실청까지 넣고는 이게 빠질 수 없지 하며 다시마국물도 만들었다. 사과도 한 개 대강대강 썰어 넣고는 수년 전 곰소에서 사온 천일염으로 간을 맞추고 나니 주위 사방은 이미 어두워 있었다.

 말이 돌나물물김치지, 레시피에서는 돌나물은 물러지니 먹을 때 넣으라는 친절한 안내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5·18물김치는 만들어지고, 깊은 밤 물김치는 냉장고에 들어갔다. 다음날 내 최초의 물김치 맛은 어떨까 하고 맛을 보는데 “아~ 바로 이 맛이야!” 그렇게 나는 가슴이 확 뚫리는 시원한 물김치를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내가 만든 물김치를.
한 번도 안 만들어봐서 그렇지, 직접 만들어보니 물김치 만드는 일은 식은 죽 먹기처럼 참 쉽게 느껴졌다. 너무도 기본적이고 당연한 일이 우리 현대사에서는 오래오래 외면되어 왔다. 우리 모두가 상식으로 여기는 일이 상식으로 통하는 사회, 물김치처럼 모두가 어우러져 한바탕 큰 조화를 이루는 그 풍경 속을 한가롭게 거닐고 싶다. 
             
 혹시 비참한 사연이 눈에 띄어 측은한 마음을 견딜 수 없으면 즉시 구제해 주고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 무릇 재해와 액운이 있으면 불에 타는 것을 구하고, 물에 빠진 것을 건져내야 하는데, 마치 내가 불에 타고 물에 빠진 듯 서둘러야지 늦추어서는 안 된다. - <목민심서> 애민편 일부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목심심서>를 통해 목민관은 과연 어떠한 자세로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가를 자세히 밝힌바, 위의 몇 자 글을 통해서도 그 마음은 충분히 전달되어 온다. 우리는 이제 목민관다운 목민관을 만날 수 있게 되었는가. 시원한 물김치처럼 가슴속을 확 풀리게 하는 세월은 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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