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회상 원불교의 터전을 익산에 마련한 뜻

글. 박윤철

 개벽회상 원불교는 영산시대 4년(1916~1919)과 변산시대 5년(1919~1924)의 준비기간을 거쳐 1924년(원기 9) 6월에 마침내 익산(益山)시대의 막을 열기에 이른다. <불법연구회창건사>에는 익산시대의 개막광경이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본회 창설 장소를 정하기 위하여 호상 논의하더니 대종사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익산군 이리 부근은 토지도 광활하고 또는 교통이 편리하여 무산자(無産者)의 생활이며, 각처 회원의 내왕이 편리할 듯하니 그곳으로 정함이 어떠하냐”고 물으심에 발기인 일동은 그 말씀에 복종하였다. (중략) 4월 29일(음력)에 예정지인 보광사(普光寺)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니 (중략) 송만경(宋萬京)의 개회사를 비롯하여 임시 의장을 선거한 바 서중안(徐中安)이 피임되다. 이어서 본회 창립의 취지 설명이 있었고 임원 선거 순에 입(入)하여는 회장에 서중안, 서기에 김광선(金光旋)으로 선정한 후 그 외 임원은 당분간 유안(留案)에 치(置)하다(=보류하다).

 위의 내용에 따르면, 개벽회상 원불교의 터전을 익산으로 정하고자 하는 이유로  대종사는 ‘토지 광활, 교통 편리, 무산자의 생활에 도움, 그리고 각지 회원의 내왕 편리’를 들고 있다. 이 네 가지 이유는 “왜 새 회상 원불교의 터전이 익산에 자리 잡지 않으면 아니 되겠는가.”에 대한 대종사 나름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100년의 역사가 흐른 지금까지도 대종사께서 익산에 새 회상의 터전을 정한 이유에 대해 깊은 검토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 호에는 익산으로 새 회상의 터전을 정한 대종사의 판단이 얼마나 ‘위대한’ 판단이었는가를 ‘과학적’으로 검증해 보고자 한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강화도조약 체결을 계기로 일제는 자신들의 정치군사적 힘을 배경으로 우리나라 조선(朝鮮)의 국권을 차례차례 빼앗음으로써 식민지배를 확립해 간다.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의 핵심은 정치군사적 지배를 수단으로 삼아 경제적 지배를 확립하는 데 있었으며, 경제적 지배는 농업자본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농업자본(農業資本)을 중심으로 한 일제의 조선침략은 러일전쟁 전후로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구체적으로, 논농사를 주로 하는 군산(郡山) 지방으로 대거 들어온 일본인들은 농사개량에 의한 증수(增收)와 지가 상승, 미가(米價) 앙등에 의한 이익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같은 이익을 위해서는 일본인의 토지취득을 합법화(合法化)할 필요가 절실했다. 그리고 일본 국내 영세공장(零細工場) 노동자의 식량 확보를 위해서라도 농업 투자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새 회상이 창립되는 1924년 전북 익산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일본인 농업자본이 들어와 있었을까? 일제시대에 군산에 거주하다가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일본으로 철수한 바 있는 후루카와 아키라(古川 昭)라는 일본인은 2005년에 <호남의 일본인>이라는 연구서를 간행했는데, 그 책 속에는 1924년을 전후하여 전북 익산군 경내에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을 필두로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장 사무소가 무려 25개나 설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호남의 일본인>, 2005, 81~83쪽) 일본인 농장 사무소 소재지를 보면 이리읍 10, 오산면 5, 춘포면 4, 황등면 2, 강경읍 1, 금마면 1, 함라면 1, 함열면 1개소 등으로 이리읍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각 면에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또한, 일본인들은 1904년부터 마다(眞田) 농장, 타사카(田板) 농장, 시모조(下條) 농장 등을 필두로 본격적으로 익산으로 침략해 들어오고 있었다. 토지 소유 규모를 보면, 1931년 말 현재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이 8,365정보로 가장 방대한 면적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2천 정보 이상의 농장이 3개소, 1천 정보 이상이 3개소, 5백 정보 이상이 2개소, 그리고 1백 정보 이상 농장이 9개소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1931년 당시 전북에서 1천 정보 이상을 소유한 일본인 농장은 총 12개소인데, 그 중에서 무려 7개의 농장이 익산군에 자리하고 있었으니, 익산은 바로 일제 농업자본의 ‘호랑이굴’ 그 자체였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새 회상 원불교가 창립되는 전북 익산이야말로 ‘정치 군사적 지배를 수단으로 삼은 경제적 지배’라는 일제의 식민정책이 가장 첨예하게 관철되고 있던 중심지였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일제의 식민지 농업자본에 의한 한국 농업 및 농민에 대한 수탈(收奪)이 가장 광범위하고도 철저하게 자행되던 역사적 현장이 바로 익산이었으며, 그 같은 수탈 즉 일제 식민지배의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는 현장 속에서 대종사는 새 회상의 깃발을 ‘힘차게’ 들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요컨대, 일제라는 호랑이굴을 외면하거나 도피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호랑이굴 안으로 들어가 새로운 종교운동의 깃발을 힘차게 들었던 소태산 대종사. 바로 그 분이 우리의 스승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깊게 되새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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