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뜻대로

내 모든 사견을 비워냈을 때
고요히 샘솟는 지혜와 따스함.

글. 박경석

 별이 빛나는 밤을 삶 속에서 가장 오래 응시했던 시절은 언제였을까요. 아마 저는 밤하늘을 수놓은 별자리만큼이나 충만함을 느끼곤 했던 군생활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모든 게 좋아 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군 생활은 시작부터 고난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친구가 입대 보름 전에 이별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녀와의 추억들과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후회와 자기혐오, 폭음과 폭식…. 입대 전까지 몸무게는 15kg이 늘었습니다. 그렇게 바닥까지 훑은 마음의 고통은 제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더 나아지고 싶었습니다.

 무거워진 몸이 훈련소 생활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지만, 그럴수록 달라지고 싶다는 열망은 선연해졌습니다. 어떤 고됨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두 달간 20kg을 감량했고, 이별의 공허함을 땀과 열정으로 대체했습니다. 헌병대에 배치되어 무려 1년간 막내생활을 하면서 빨래에, 청소에, 근무에, 작업까지…. 정말이지 양치할 틈도 없이 지냈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제가 더 바닥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나봅니다. 억지로 나간 축구시합에서 상대의 실수로 무릎 측부 인대가 터지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과 ‘왜 하필 누구보다 열심히 했던 나에게 이런 일이.’ 하는 방향을 잃은 불만과 자괴감, 다친 나를 감추기에 급급했던 부대에 대한 실망감까지. 그 모든 감정은 그간 가졌던 희망의 무게 이상으로 제게 더 큰 원망을 선사했습니다. 그런 저의 두려움을 잡아준 것은 훈련소 시절 받은 작은 성경 속 한 문장이었습니다. ‘내 뜻대로 하지 마시옵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 그 말씀이 왜 그렇게도 좋던지.

 마음에 대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왜 저를 이토록 힘들게 하시나이까.” 쏟아낼 게 없을 때까지 쏟아낸 뒤 “그럼에도, 그럼에도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마음을 놓아버리자 머리가 맑아지며 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만나야 할 인연과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이 이곳에 있다.’ 그토록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저에게 진정한 변화란 과거의 자신에 대한 부정이 아닌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껴안을 때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전역 후 어머니를 따라간 교당에서 ‘텅 비어 가득 차게 하소서.’ 란 문장이 걸려있는 걸 보았습니다. 내 모든 사견을 비워냈을 때 고요히 샘솟는 지혜와 따스함, 그것은 아마 제가 고통의 끝에서 모든 걸 내려놓았을 때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일원상은 저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저는 그저 믿고 그 허공 속으로 내 모든 경계를 던지고 걸어 나가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그 때의 밤하늘처럼.

 

깊은 공중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천장이리라.

글. 김선욱

 별일이었다. 좋아하는 전복을 먹었는데, 몸에서 이상 신호들이 올라왔다. 눈 주위가 퉁퉁 부었고, 얼굴은 붉어졌으며, 매캐한 느낌이 입안을 맴돌더니 예고 없는 기침이 자꾸 이어졌다. 모처럼 기분 전환하고 싶어서 찾아온 제주였는데, 처음 먹은 끼니로 인해 여행이 온통 꼬이게 될 모양새였다.

 주변에서 약국을 간신히 찾은 뒤, 알레르기 약을 받아먹었다. 증상이 더 심해지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몸에는 이상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일행의 여행까지 망치기는 싫어서, 일단은 최대한 괜찮은 척 했다. 여유로운 파도, 저 멀리 보이는 오름의 윤곽 같은 것을 보고 ‘우와, 우와!’ 했지만 내 감탄은 연기에 가까웠다.

 연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일행은 여전히 귓볼 부근이 붉은 나를 보며 다시 걱정하기 시작했다. 십 분에 한 번 꼴로 “괜찮아?”라고 물었고, 그때마다 나는 반사적으로 “괜찮아.”라고 대답했다. 우리의 대화는 단조로운 파도처럼 서로를 들추다 말다 했다. 함께 걷는 걸음 소리는 서로 배려하고 있음을 생색내는 시그널이었다.

 갈치조림을 잘한다는 집의 간판이 툭 하고 꺼졌다. 저 멀리 보이는 등대 외에는 불빛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우리는 걸음을 멈췄고, 나는 핸드폰으로 후레시를 켜려고 했다. 그때 일행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와, 하늘 봐.” 나는 가만히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깊은 공중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천장이리라. 그냥 그 아득한 깊이를 속으로 재어보는 것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지는 제주의 밤이었다.

 하늘을 얼마나 쳐다봤을까. 별 하나가 문득 보이더니, 그 별 주위로 파동이 번지는 것 마냥 못 보던 별들이 계속 등장했다. 우리는 신이 나서 오른손을 들고 보이는 별들을 모두 가리키기 시작했다. “여기도, 저기도.” 별들은 오랫동안의 숨바꼭질을 참지 못하고 나온 술래들처럼 제 존재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우리는 둘 다 별자리를 잘 알지 못했다.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아를 빼고는 가늠할 수 있는 별자리가 없어, 각자 보이는 별을 제멋대로 이어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둥그렇게 별 몇 개를 가리키곤 전복자리라고 했고, 물음표자리라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어둠의 최대치쯤 되었을까? 우리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괜찮다고 에둘러 말하지 않아도, 이미 서로 괜찮음을 느낄 수 있는 밤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불안하지 않은 그때,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저토록 빛나는 별을 닮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일정을 위해 일찍 잠을 청하는 밤. 하늘을 오래 쳐다본 탓일까? 불을 모두 끈 천장에는 어렸을 적 붙여놓은 야광별 같은 잔상이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동쪽 바다의 자장가와 무수한 별이 빛나는 간밤. 나는 블랙홀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때 그 별들은 아직도 종종 밤에 찾아와서는 가만히 위로를 던지고 간다. 이제는 어떤 어둠이나 막막함이 와도 바라볼 하늘이 있음을 안다. 늘 같은 자리에 있는 찬란이 있다는 것도.


여름밤 축제

일상에서 벗어나 밤에는 이토록 멋지고 재미난 일탈.

글. 조아라

 지금, 늦봄과 초여름 중간의 선선한 밤이 좋다. 최근 내가 즐겨하는 행동은 퇴근 후 모두 잠들었을 것 같은 깜깜한 밤이 될 때까지 집에서 조용히 음악을 듣는 것이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또는 그냥 이 밤을 즐기고 싶을 때면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는다. 대부분 그루브하고 달콤 쌉싸름한 노래들이다. 눈을 감고 조용히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많은 생각이 든다. 마치 내가 사랑, 이별 노래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감정이입이 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이렇게 음악에 푹 빠져 있으면 뭔가 대단하고 분위기 있는 여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보통은 집에서 혼자 조용히 음악을 듣는 편이지만, 야외 페스티벌이나 축제에서 음악을 즐기기도 한다. 조용하면서도 흥이 넘치는 성격이라 일 년에 한 번씩은 여름 페스티벌에 꼭 간다. 술, 음악, 사람들 모두가 있는 축제에서 한껏 목청 높여 소리 지르고 뛰어놀면서 스트레스를 풀면, 그 덕에 또 한 주를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별이 빛나는 밤에, 나는 재작년에 갔던 ‘자라섬 페스티벌’의 아이유 무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낮에 본 다른 가수들의 무대도 신나고 재밌었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들리는 발라드와 어쿠스틱 음악은 감수성을 더욱 풍부하게 했다. 공연이 절정에 다다르자 때마침 아이유가 나온 무대에서 무대 조명과 다른 음악 장치를 다 껐다. 덕분에 우리는 오직 가수의 목소리와 기타반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황홀하다’는 말은 이 순간에 쓰는 것이 아닐까. 적당히 쌀쌀한 날씨와 가슴을 울리는 음악. 내 마음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수 놓인 밤. 삼박자가 참 잘 맞는 하루였다.  

 최근에는 어느 대학교의 축제에 갔다 왔다. 맥주 회사와 제휴를 맺어, 보다 큰 스케일의 축제였다. 대학교 축제라 기대를 많이 하지 않았는데 라인업이 굉장히 화려해서 직장 동기와 퇴근 후 냉큼 달려갔다. 야외페스티벌과 다른 대학교 축제의 재미는 대학생들이 주막을 열고 자발적으로 다양한 대회를 열어 공연 외에도 볼 것이 많다는 점이다. 축제 시작 전 붕 뜬 마음을 다잡고 일단 맛있는 음식들을 섭렵하기로 했다. 여러 푸드트럭과 주막들 사이에서 큐브스테이크, 초밥, 모둠꼬치, 맥주 등으로 저녁을 해결하자 배가 든든해졌다. 우리는 무대 중앙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슈퍼비, 면도, 자이언티, 그레이, 박재범 등 힙합 가수들이 대거 나왔다. 리듬에 몸을 맡기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동안 묵힌 스트레스를 다 날려버리고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도 느끼고 정말 좋았다.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갔다 온 건데 안 갔으면 후회했을 정도로 정말 근사한 공연이었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밤에는 이토록 멋지고 재미난 일탈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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