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심곡 바다부채길

수천만 년의 시간, 찰나의 순간에 눈뜨다

취재. 장지해 기자

발아래로 바닷물이 쏴아- 밀려듭니다. 돌에 부딪혀 하얗게 변하는 포말 덕분에 마치 진짜 구름다리를 건너는 것 같은 느낌이죠.
철책 너머로는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진짜 야생화들이 가득 피었네요. 철조망의 날카로움이 무색하게도 말예요.
게다가 바다와 부채가 만난 이름이라니! 말만으로도 절로 시원함이 전해지죠.

일찍 찾아온 무더위 속에서 헉헉거릴 즈음 향한 동해바다.
그곳에서 2천3백만 년 전 지각변동에 의해 탄생한 동해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을 만났습니다. 인류의 탄생보다도 2000년이나 먼저 태어난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만날 수 있을까요?
강릉 정동진부터 심곡항을 연결하는 탐방로인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은 국내 유일의 해안단구입니다. 파도에 깎여 평평해진 해안이 솟아올라 형성된 계단식 지형을 해안단구라고 한다죠. 정동에서 심곡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그동안 군부대의 정찰로로만 사용되고 일반인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곳이었지만, 강릉시가 국방부 및 문화재청과 2년 간 협의한 끝에 작년 10월에 처음으로 개방을 한 거라고요.
총 2.86km, 1시간 10분이면 충분할 거라던 트래킹 시간이 조금 더 걸립니다.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눈 둘 곳이 많다보니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거죠.
오랜 세월 동안 해안단구가 만들어 둔 절경이야 당연하고, 뾰족뾰족 철조망을 벗삼아 흐드러진 야생화, 보초를 서는 군인들이 걸었을 좁은 시멘트길들을 살피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하지만 군데군데 세워진 군 초소와 바다부채길을 걷는 내내 길게 이어지는 철조망과 군사지역 안내 표지판은 우리나라 분단의 현실을 직시하게도 만들죠. 언젠가부터 이곳에 서 있었을 가로등은, 얼마나 많은 분단의 밤을 비추었을까요.
정동지역의 ‘부채끝’이라는 지명에 착안해 탐방로가 위치한 지형이 바다를 향해 부채를 펼쳐 놓은 모양과 비슷하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 ‘바다부채길’. 이름만큼이나 바다를 향해 활짝 펼쳐진 부채길을 따라 걷다보면 마음까지 촤르르- 펼쳐집니다. 넓어지는 거죠. 그때서야 들이쉬는 숨 안으로 제법 많은 양의 바람이 들어옵니다. 넓어야 더 많이 담을 수 있다는 걸, 그렇게 자연의 한 가운데에서 배우는 거죠.
켜켜이 쌓인 해안단구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던 어느 지점에 서서야, 감히 헤아릴 엄두조차 나지 않는 2천3백만 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경외감이 생깁니다. 긴 세월을 켜켜이 쌓아왔으니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잠들었을까요. 그러기에 바닷물로 매일 씻어내는 거겠죠. 거기에 비하면 우리들의 하루하루는 아주 찰나의 순간. 그런데 추억이란 이름으로 첩첩이 쌓아둔 채 아등바등 살아가지요.
바다부채길에서 지난 기억들을 씻어내고 털어내 봅니다. 바다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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