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정성은 신(神)과 같다


섭섭한 인연도 소중하게

 사람이 현생에 사는 것을 보면 전생에 어떤 노력을 했는가를 대체로 알 수 있습니다. 또 현생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일했는가를 보면 다음 생을 알 수 있지요. 생사는 조만이나 시기가 없습니다. 숙세에 지은 바에 따라 거래를 하고, 또 지은 바를 바탕으로 현생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연장되기도 하지요.
 
 전생에 지은 업력의 종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업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업이지요. 생사를 비유해 볼 때 정업은 ‘어느 날 어느 시간에 죽는다.’ 하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이건 부처님도 어쩔 수 없는 업보입니다. 그런데 부정업은 ‘큰 틀에서 어떤 업에 의해 거래가 된다.’는 것입니다. 큰 흐름 속에서 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노력을 하면 정해진 생사를 연장할 수도 있고 오래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정업과 부정업을 교차해가며 업을 짓습니다.

 금생을 살면서 인연 복을 많이 지어야 합니다. 주변에 좋은 인연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그 인연을 따라 내가 함께 진급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좋은 인연이든지 나쁜 인연이든지 나와 한 번 걸린 인연은 모두 좋은 인연으로 만들어야합니다. 혹 나와 섭섭한 인연이 있더라도 내가 당해주거나 더 잘하기로 다짐하면서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인연을 지어갈 때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을 가리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좋든지 싫든지 간에 내가 더 잘해줌으로써 오래가는 인연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인연 농사를 적게 지은 사람은 다음 생에 외롭습니다. (102. 05. 05 故 갈산 김연성 정사 열반 독경)



꽃보다 아름다운 봉공

 4월에 꽃이 참 예쁘게 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봉공회는 예쁘게 핀 봄 꽃보다도 아름다운 것 같아요. 꽃은 보기가 좋을 뿐만 아니라 향기롭고 결실을 맺기 위한 기초가 되기도 합니다. 봉공회도 그런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움직이는 모든 것이 원불교 불사입니다. 개인적으로 가든지, 단체로 가든지, 어딜 가든지 원불교 불사를 이뤄내고 부처님의 법문을 전하는 전법 사도라는 점을 깊이 생각하면서 실천하면 그것이 중생을 제도하는 첩경이 됩니다.

 꽃에는 향기가 있어요. 매화도 겨울에 추우면 봄에 그 향기가 더 짙다고 합니다. 힘든 시간을 이기려고 애를 쓰고 인고의 노력을 하면 향기가 더 짙어진다는 거죠. 봉공회원들에게서 나는 향기 역시, 원불교를 알아주지 않는 그 시절부터 지극정성으로 해온 그 마음 덕분에 더욱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 같습니다.

 지성위신(至誠爲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다는 뜻이지요. 세상에 어떤 사람이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머리가 좋고 재주가 있는 사람보다, 자기가 하고 있는 불사에 온갖 정성을 들이는 사람이라야 신통한 지혜가 생기고 안 될 일도 이루어지는 그러한 실력과 위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지극한 정성을 통해 더욱 향기가 넘치는 봉공회가 되길 바랍니다. (102. 05. 11 원불교 중앙봉공회 40주년 기념대회)



저 언덕으로 가는 지름길

 부처님의 경전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경전은 <금강경>이고, 금강경의 핵심은 반야심경입니다. 반야심경 맨 마지막에는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라는 반야주문이 있지요. 과거에는 이 주문을 밀주(密呪)라고 해서 내용을 자세히 공개하지 않고, 그저 신심을 갖고 많이 외우라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밝은 미래 세상에는 이것을 알고 외우고 실천하면서 전해야 훨씬 그 공덕이 커집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는 ‘가세 가세 가보세. 부처님이 계시는 저 언덕으로 가세.’라고 번역을 합니다. ‘바라승아제’의 승(僧)은 ‘함께 완결되다’란 뜻이 있습니다. ‘모제사바하’는 깨달음을 기리세, 깨달음을 즐기세 라는 의미이지요. 다시 정리하면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가세. 저 언덕으로 함께 가서 깨달음을 즐기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자’는 말은 정진하자는 뜻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세 가세’는 결국 ‘정진하자 정진하자’는 말이 되겠지요. 그럼 ‘저 언덕’이란 어떤 곳일까요? 중생들이 사는 ‘이 언덕’은 오욕에 불타고 있는 언덕입니다. 탐·진·치심 그리고 거짓으로 얼룩져 있는 중생의 세계와 반대로 불보살이 극락을 이루는 그런 세계가 바로 ‘저 언덕’인 것이지요.

 그럼 ‘저 언덕’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계문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계문을 잘 지키는 것이 저 언덕으로 향하는 기초가 되는 것 같아요. 계문을 많이 범해서 업장이 쌓이면 앞길이 막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계문을 두렵게 여기고 사는지 늘 고민하고, 별스럽지 않은 계문이라고 생각될지라도 두렵게 여기고 잘 지킴으로써 저 언덕으로 가는 지름길을 찾길 바랍니다. (102. 05. 03 석존성탄절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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