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범행
어여쁜 둘째 아들이 엇나갈까 노심초사하셨을 어머니.

글. 노승원

 돈을 훔쳤다. 지퍼가 달린 검정 지갑엔 만 원짜리 지폐 수십 장이 족히 들어갈 수 있게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 지갑 안에는 지폐가 두둑하게 들어 있었다. 돌연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한두 장쯤 사라져도 모를 거라는 어린 생각에서였다. 결국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누가 볼 새라 급히 나의 호주머니 깊은 곳에 구겨 넣었다.

 그로부터 약 1년 간, 나의 깜깜한 범행은 계속되었다. 만 원으로 시작했던 것이 이만 원, 삼만 원, 일주일에 한 번씩 저질렀던 것이 두 번, 세 번, 점점 그 횟수와 금액이 늘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구도 찾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빛조차 들지 않는 베란다 책장 한구석에 숨겨 놓은 에나멜 가죽의 삼단 지갑이 안방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리고는 막 놀다 들어온 나에게 엄마는 조용히 물었다. “너 이거 어디서 났니?” 초등학교 3학년에서 이제 막 4학년이 될 무렵이었다.

 범행의 마침표를 찍은 지 십여 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 그 때는 보지 못했던 그날의 일들을 다시 생각해 본다. 뒤늦게 안 사실로, 어렸을 적 훔쳤던 돈은 보험회사에 다니셨던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수금해 놓은 보험료였다. 만 원은 차치하고 천 원이라도 틀리면 안 되는 액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깜깜한 범행이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기적처럼 이루어질 수 있었던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눈 가리고 아웅하는데 모를 리 없으셨을 어머니,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여쁜 둘째 아들이 엇나갈까 노심초사하셨을 어머니, 언제 어떻게 바로 잡아 줘야할지 애타게 고민하셨을 어머니, 결국 조심스레 꺼낸 그 한 마디가 “너 이거 어디서 났니?”였을 것이다.

 왜 그때 곧바로 나에게 돈을 훔치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으셨을까. 왜 그때 나에게 그 상황을 빠져나가도록 변명할 기회를 주셨을까. 왜 다 아시면서도 울면서 아니라고, 나는 절대로 아니라는 나의 억지를 곧이곧대로 믿어주셨을까. 사랑이었나 보다. 한 마디 말로 정의하기에 너무도 터무니없는 사랑이었나 보다.

 지리산 속에는 연못이 있는데, 그 위에는 소나무가 죽 늘어서 있어 그 그림자가 언제나 못에 쌓여 있다. 못에는 물고기가 있는데 무늬가 몹시 아롱져서 마치 스님의 가사와 같으므로, 이름하여 가사어라고 한다. 대개 소나무의 그림자가 변화한 것인데, 잡기가 매우 어렵다. 삶아서 먹으면 능히 병 없이 오래 살 수 있다고 한다.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소나무의 그림자가 없었더라면 존재하지 못했을 가사어. 이 가사어에 드리워진 소나무의 그늘처럼, 언제고 내 몸에 드리워진 어머니의 그림자로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어느 작가의 말마따나, 나 역시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나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의 매실액
엄마의 사랑과 걱정이 담긴 비상약.
그 매실액을 껴안고 나는 펑펑 울었다.

글. 이지현

 나는 8년 만에 엄마와 한 지붕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다.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하며 지낸 지가 벌써 8년. 열일곱 살, 다른 지역에 있는 특성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처음 자취할 때는 그저 엄마의 관리 밖에서 혼자 생활할 수 있다는 것에 들떠 있었다. 스무 살이 되어서 유학을 가서는 새로운 환경과 언어, 문화, 그리고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 향수병에 젖을 겨를도 없이 하루하루 즐겁게 생활을 했다.

 보통의 비슷한 환경의 유학생들 중에는 가족과 친구들, 특히 엄마가 해준 집밥을 그리워하면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요리가 전공이라 곧잘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었기에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 별로 없었다.

 한 날은 시험 기간에 배탈이 나서 시험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뭐라도 마실까 해서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엄마가 직접 담가 준 매실액이 있었다.
엄마의 매실액. 어릴 적 배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때로는 차갑게, 때로는 따뜻하게 해서 타 주었던 엄마의 사랑과 걱정이 담긴 비상약. 그 매실액을 껴안고 나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학교생활을 잘하려고 아등바등하던 나날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가고, ‘왜 하필 지금 아플까?’ 하는 갈 곳 없는 원망이 생겼다. 그 긴장과 외로움과 서글픔을 엄마가 ‘괜찮다, 괜찮아. 혼자서도 잘하고 있다.’며 위로를 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엄마는 내가 타지에서 학교생활을 할 때 성적을 물어본 적이 없다. 그저 내가 항상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알고, 믿고, 묵묵히 지켜봐주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항상 내 냉장고 한 칸에 있었던 매실액처럼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혼자 생활하는 것이 편했던 것이 아니라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엄마가 나를 믿어주는 만큼 잘하려고, 나 스스로가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되뇌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은 나도 엄마의 품이, 엄마의 집밥이 그리웠던 것이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짧은 직장생활을 한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취업을 하기 전 엄마와 1년 정도 함께 살기로 했다. 현재 6개월 정도가 흘렀다. 8년 중 잠깐씩 만났던 시간보다도 지금 같이 생활하고 있는 이 시간이 더 길다. 붙어 있는 시간이 길면 싸운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도 때로는 다투곤 하지만, 친구처럼 생활하고 있는 이 기간이 너무나 소중하다. 17살, 아니 20살에 지금과 같은 시간을 보냈더라면 아마 요즘처럼 지낼 수 없었을 것 같다. 조금은 철이 든 지금에야 엄마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나를 믿어줬는지 그 마음의 깊이는 이해를 아직 다하지 못하겠다. 떠나는 사람보다 남은 사람이 더 공허하고 빈자리를 크게 느끼는 것 같다. 이 1년의 기간을 다 채우고 나면 나는 또 다시 집을 떠나야 한다. 이번엔 엄마와 나, 둘 다 서로의 빈자리를 느낄 것이다. 그러니 더욱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을 하루하루 소중히 여기며 지내야겠다.

 

원마을 원뮤직슐레 원장님
그 와중에도 감사함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우리 엄마지만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글. 윤은솔

 나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원불교를 다니게 되어 태어나기 전부터 원불교라는 종교를 가지게 되었다. 엄마도 어린 시절부터 외증조할머니를 따라 교당에 다녔다고 한다. 원남교당 어린이회, 방배교당 학생회와 청년회를 거쳐 지금까지 교당생활을 하고 있으니 내게는 한참 선배님인 셈이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이른 새벽 거실에서 혼자 기도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또 틈틈이 법문 사경을 하는 등 집에서도 스스로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며 자라왔다. 내가 한창 대학 입시 문제로 조급해 할 때 엄마는 “교전을 읽으면 마음이 편해진다.”며 나에게 교전 봉독을 권해주셨다. 어렸을 때부터 교당에 다녔지만, 그 때 처음으로 교전을 정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원불교 교리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직접 실천하는 엄마의 권유라 더욱 와 닿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외할아버지께서 폐암 말기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다. 그 때 엄마는 매일매일 새벽 기도는 물론, 점심·저녁으로 틈날 때마다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셨다. 엄마의 그런 기도 위력 덕분인지, 할아버지는 우리와 19개월을 더 함께 하셨다. 엄마는 이 또한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서 할아버지를 잘 보내드리기 위해 노력했다. 만약 나라면 슬픔에 빠져 힘들어하기만 했을 텐데 그 와중에도 감사함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우리 엄마지만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지금 우리 엄마는 전공을 살려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고 계신다. 학원 이름은 원뮤직슐레이고, 학원이 있는 동네 이름은 원마을이다. ‘원마을에 있는 원뮤직슐레 원장님’. 심지어 성가 19장에는 엄마 법명까지 나온다. “힘을 모아 이. 법. 선. 을 운전해가자.” 조금은 억지스럽지만 우리 엄마와 원불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 게 분명하다. 하하.

 엄마는 손재주가 좋아서 이것저것 만드는 걸 좋아하는데, 그 재주를 살려 교무님들이나 교도님들이 필요한 것을 만들어 선물하곤 한다. 뜨개질로 모자, 목도리, 가디건, 손가방, 좌종채 덮개 등을 만들기도 하고, 한복 만드는 걸 직접 배워서 교무님들의 저고리를 만들기도 한다. 교무님들께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게 행복이라고 하신다. 나에게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이 행복이다.

 요즘 엄마는 엄마의 주변 법연들에게 매일매일 카카오톡 메시지로 법문을 보낸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나도 한 번 해볼까 생각하다가 올 1월부터 분당교당 청년회원들에게 매일 아침 법문을 보내기 시작했다. 엄마 덕분에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법문을 읽게 되고 법연들과 좋은 법문을 나눌 수 있어 감사하다.

 원불교라는 종교를 갖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오히려 나에게 “교당 생활을 열심히 해줘서 더 감사하다.”고 말하는 우리 엄마. 내가 지금껏 교당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우리 엄마 때문이지 않을까. 앞으로도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교당생활을 해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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