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물결 따라, 노고단 바람결 따라

취재. 정은구 객원기자

 하늘이 어둑하더니만, 결국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국시모지리산사람들’이 진행하는 프로그램 ‘빛나라 지리산’의 단장 조성천 교무(보절교당)가 하늘을 살핀다. 구례 오미마을에서 구례 황전마을까지 이어지는 둘레길을 걸으려면, 속절없이 우비를 입어야 할 판이다. 그러는 사이 속속 참가자들이 합류한다. 첫 만남 장소인 구례터미널엔, 참가자들을 싣고 이동할 노란색 중형차가 대기 중. 윤주옥 대표(국시모지리산사람들)도 반갑게 참가자들을 맞이한다. “오랜만입니다.” “아이고, 오셨어요?” 살가운 인사가 오가는 동안 자동차는 출발지인 오미마을로 향한다.

 “저 꽃은 뭐예요?” “찔레꽃이요.” “아, 이게 찔레꽃이구나. 나는 찔레꽃을 불러만 봤지~.” 보슬보슬 내리는 비 사이로 작게 피어난 꽃망울이 총총 올라온 둘레길. 서로 재촉하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며 걷는 길은 마냥 즐겁다. 젖은 흙냄새를 맡으며 빈 정자에 둘러 앉아 먹는 낮밥의 맛은 또 어떠한가. 서로 들고 온 반찬을 십시일반 모아 나누면 이보다 멋진 진수성찬이 없다. 그렇게 우비를 입고 도란도란 걷다 보니 어느덧 황전마을에 도착!

 “그동안에는 둘레길을 걷기만 했는데, 주변에 사는 어른들께도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빛나라 지리산이 어디 지리산 둘레길만 돌아보는 프로그램이던가? 자고로 지리산 자락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서야 이곳 생태계를 더욱 잘 받아들일 터다. 온 동네 어르신들을 모셔다가 간식거리를 대접하고,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어울리는 시간.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만, 두 시간 남짓한 동안 친근해지기엔 부족함이 없다. 이장님에게 과거 이야기도 듣고, 한바탕 웃고 노는 동안 빗줄기는 거의 잦아들었다. 이젠 종복원기술원을 찾아 국립공원의 생태계에 대해 알아볼 차례. 지리산에 40마리가 넘는 반달곰이 산다는 것도 알게 되고, 저녁엔 지리산의 50년 역사를 돌아보는 강의도 듣는다. 차곡차곡 쌓이는 지식만큼이나 지리산에 대한 애정도 솟아나는 중이다.

 3월, 5월, 7월, 9월, 11월. 두 달에 한 번씩 진행되는 빛나라 지리산의 프로그램은 매번 달라진다. 그러니 지리산을 둘러싼 다섯 개의 시군을 오가는 재미가 쏠쏠할 수밖에. 당초 지리산을 이해하고, 지리산 자락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알고자 시작된 프로그램이 바로 ‘빛나라 지리산’. 올해는 지리산 국립공원 50주년이라 그 의미가 더욱 남다르다. 때문에 국립공원관리공단과 협약을 맺고, 지리산 주변 마을을 방문해서 교류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마을 방문 외에, 산행도 빠질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다.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맞이하는 둘째 날 아침. 이틀째엔 지리산 노고단을 올라가기로 한 참이다. 저마다 단단히 준비한 산행 장비를 착용하고 성삼재로 향하는 길. 어제 비가 내려준 덕분에 날이 무척 환하다. “점심 받아가세요~.” 뜨끈한 약밥 한 덩이씩을 가방에 넣으면 준비 완료. 피다 만 진달래 군락지가 ‘빛나라 지리산’ 참가자들을 반겨준다. “여긴 이제 막 봄이 온 모양이에요.” 20여 명의 사람들 얼굴에도 발간빛 꽃망울처럼 생기가 돈다. 도란도란 참가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올라가는 길은 힘들기보단 상쾌하다. “전 국립공원에 위안을 받아요.” 짙푸른 녹음에 감탄하던 윤 대표가 환하게 웃는다. 그녀는 서울에서 국시모(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들의 모임) 활동을 하다가 현장을 지키기 위해 구례로 내려왔다. 덕분에 반나절이면 지리산에 올 수 있게 됐다. 케이블카 문제로 시끄러웠을 땐 이틀에 한 번꼴로 노고단을 찾았다. 인생의 1/3을 노고단과 함께한 것이다.

 ‘쉽사리 지리산을 찾지 못했는데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계기를 얻게 되었다.’는 참가자들의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단지 산행만 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으니 더욱 좋단다. 누구든지 사정에 맞게 당일치기부터 1박 2일, 2박 3일로 참여하다 보면 만남과 이별도 순식간에 흘러가기 마련. 오늘만 해도 성삼재에서 새롭게 합류한 일행들이 있다. 하지만 어색할 일은 없다. 노고단에서 능선길을 따라 임걸령으로 넘어가고 나면, 어느덧 서로의 약수를 챙겨주는 친밀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이제 산을 내려가 천은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고 나면 모두가 한마음으로 어우러질 테다. 윤 대표가 참가자들을 챙기며 저 멀리 천왕봉을 바라본다. “지리산은 그냥 산이 아니라 국립공원이에요. 수많은 동식물이 이곳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도 자기 자리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겠죠.”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을 바라보며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라도 공유하길 바란다.

 한 마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 소리가 섬진강 물결에, 노고단 바람결에 실려 멀리멀리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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