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보리밭에 서다
바다 바람 파도 보리 그리고 변명

취재. 노태형 편집인

 할 일 없이 지내야 하는 겨울동안 보리밭은 아이에게 놀이터가 됩니다.
 한동안 버려진 땅에 보리라도 심었기에 파릇파릇 생명이 돋는 거죠. 그 생명들 꾹꾹 밟아주어야 겨울을 지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룻밤 또 하룻밤을 자고 나니, 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파도가 치나 봅니다. 바람이 쓱 흔들고 지나갈 때면 지나온 삶의 파도가 가슴에 가득 차오르죠. 세상에 어찌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세상이 어찌 내 뜻대로 이뤄지겠습니까. 파도 없는 삶은 지루하고 나태합니다.

 “왜 그렇게 까마득히 잊고 사니? 보고 싶지도 않니? 그게 네가 바라는 세상의 종착이었어?”
꿈이었습니다. 살다보니 잊는 게 많고, 잊는 게 많다보니 살아지기도 합니다. 새까만 밤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건, 이제 생각할 게 많아진다는 것이겠죠. 사실, 내 삶의 배를 짊어지고 다니면 무겁기에 쉬이 벗어냅니다. 그래서 뻔뻔해지죠. 아, 그래서 변명이 많아지나 봅니다.

 하필, 비오는 날 보리밭에 서서 내 젊은 날의 바다를 떠올립니다.
 찬물에 보리밥 한 덩이 풍덩 말아서 허기를 메우던 친구가 있었고, 보리밥을 한 알 한 알 골라내며 투정 부리던 형제가 있었고, 외지고 메마른 길을 혼자 거닐던 그리움이 있었습니다. 다들 잘 있을까요? 다 잊고 살겠죠. 살기 바빠서, 말입니다.
 “언제 밥 한 그릇 먹자.” 그리고 몇 년 째 소식마저 뚝 끊긴 사람들, 사람들. 참 보잘 것 없는 삶이 보리밭에서 출렁입니다.

 폭식의 시대가 지나고 있습니다.
 건강식과 자연식이 대세라고 합니다. 아마 살만해진 거겠죠. 그래서 한동안 재배에서 제외되었던 보리들이 다시 고개를 듭니다. 인류가 농경문화 시대를 열면서부터 재배되어온 오랜 역사의 작물이 보리라는군요.
 보리는 겨울에 자라는 작물이라 병충해가 붙지 않아서 농약에 안전하고, 맥아당 ·전분·단백질 등을 주성분으로 해서 소화를 돕고 혈당강화작용을 합니다. 새싹보리는 칼륨과 칼슘 등의 무기성분과 비타민C 등 영양성분이 풍부해서 녹즙처럼 갈아 마시거나 샐러드 비빔밥에 넣어 먹어도 좋고, 프라이팬에 볶아 차로 마셔도 좋다네요. 
 
“보리밥 먹어라. 보리밥 먹어라.” 아마 옛 어른들은 욕심이 부질없음을 일찍 알았던 모양입니다. 보리를 키우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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