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글. 노태형 편집인

 많이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알고 보니 아는 게 없었습니다. 그때 문득 떠오른 말이 ‘바보야!’라는 말이었죠. 한때, 김수환 추기경이 동그란 얼굴에 눈·코·입을 그리고, 그 밑에 ‘바보야’라고 쓴 자화상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작품설명에서 “내가 잘났으면 뭘 그리 크게 잘났겠어요. 다 같은 인간인데.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보지. 그러니 내가 제일 바보처럼 살았는지도 몰라요.” 하고 말했죠. 우리 사회에서 최고의 정의로운 지도자로, 또 어른으로 존경받던 그의 말은 겸손을 넘어 충격이 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바보’는 일종의 금기어에 가깝습니다. 지식이 넘쳐나고, 모두가 배울 만큼 배운 고학력 사회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배우기보다 가르치는 일에 더 익숙하고, 양보하기 보다는 따지는 일에 더 능숙하며, 듣기보다는 말하는 것에 더 열중하죠. 자기의 어리석음에는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변명과 핑계는 산처럼 쌓여 진실을 덮습니다.

 진정한 깨침은 모르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안다고 하는 순간, 지혜의 등불은 캄캄한 암흑이 됩니다. 나의 앎이 어리석음이 되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마음을 닫게 하죠. 어설픈 지식이 나를 자존심의 감옥에 가두어 소통의 단절을 가져옵니다. 인간의 앎이란 게 누천년의 역사와 울타리마저도 짐작키 어려운 우주에서 티끌 속의 티끌일 뿐인데, 말이죠.

 소태산은 스스로를 석두(石頭)거사라 불렀습니다. 머리가 몹시 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석두’. 즉 소태산도 ‘난 바보요.’ ‘난 아무것도 모르오.’ 하고 자백한 거죠. 아마, 세상 살면서 바보가 되는 순간에 비로소 지혜의 등불이 켜지나 봅니다. 그러니 묻고 또 묻고, 듣고 또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답은 ‘입’에 있는 게 아니라, ‘귀’에 있으니까요.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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