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와 이리에게 ‘자연스런’ 어짊(仁)이 있다
글. 김정탁

《장자》에서 제목이 ‘천(天)’으로 시작하는 편이 3개 있다. 외편에 나란히 등장하는 <천지(天地)>, <천도(天道)>, <천운(天運)>편이 그것이다. 이 세 편은 분량까지 길어 외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꽤 된다. 그런데 ‘천’의 해석을 놓곤 같지가 않다. <천지>는 ‘하늘’과 땅으로 직역하는 게 맞지만 <천도>와 <천운>은 각각 ‘자연’의 도와 ‘자연’의 운행으로 해석하는 게 장자의 의도에 더 부합하기 때문이다. 사실 장자를 읽다보면 ‘천’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 해석이 ‘하늘’과 ‘자연’으로 나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이 세 편이 다루는 주제는 공히 무위자연(無爲自然)이기에 ‘자연스러움’을 말하려는 게 세 편의 취지라 말할 수 있다.
무위(無爲)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상당수 장자 관련 책들이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무위 역시 유위(有爲)와 마찬가지로 ‘하는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유위에는 하려는 의지가 있지만, 무위에는 하려는 의지가 없다. 하려는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하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자연의 변화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꽃이 지면 신록이 돋아나고, 신록이 녹음으로 변하면 여름이 오지 않는가? 이런 변화들은 어떤 의도와 목표를 갖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저절로 이루어진다. 또 이 변화 중에 어떤 게 싫다고 건너뛰지를 못한다. 이렇게 보면 하늘과 땅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치고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란 없다. 그렇지만 인간의 손길이 닿으면 무위는 유위로 변해 인위(人爲), 심지어 작위(作爲)가 생겨난다.
장자는 이런 무위의 자세로 천하를, 나라를, 가정을 다스리는 걸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다. 장자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대종사(大宗師)라 말한다. 반면 세상의 많은 군주들은 유위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한다. 그래서 영토를 무리해서 늘리고, 이를 위해 전쟁을 벌이고, 전쟁에 이기기 위해 군사를 기른다. 이때 기획과 관리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유위(有爲)에 따른 다스림의 전형적인 예다. 이런 유위는 결코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천지>와 <천도>에서는 이상적인 군주의 조건으로 무위자연에 입각한 천하 경영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성인(聖人)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물론 장자가 말하는 성인은 유가가 말하는 성인과 성격이 다르다. 이점에 대해선 지난 번 글들에서 설명한 바 있어 여기선 생략한다.   <천지>와 <천도>에 이어 <천운>에서도 자연스러움을 강조한다. 그래서 <천운>은 ‘하늘이 움직이는 건가, 땅이 제자리에 있는 건가?’라는 의문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의문문은 계속된다. ‘해와 달은 하늘의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는가? 천지일월(天地日月)의 위치를 정하는 건 누가 주재하는가? 또 누가 이 질서를 유지하는가? 아무 일도 없이 누가 천지를 움직여서 그렇게 되도록 하는가? 생각컨데 땅이 제 자리에 있는 건 베틀의 줄이 있는 것처럼 부득이한가? 또 생각컨데 하늘이 움직이는 건 굴러 도는 것처럼 스스로 멈출 수 없는가? 구름이 비를 오게 하는가? 아니면 비가 구름을 만드는가? 누가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는가? 또 아무 일도 없이 누가 지나치게 즐기면서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는 걸 권하는가? 바람은 북쪽에서 생겨나 서쪽으로, 또 동쪽으로 불면서 상공을 헤매는데 누가 바람을 내쉬고 들이쉬게 하는가? 또 아무 일도 없이 누가 바람을 부채질하는가?’
이런 의문 뒤에는 모든 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암시가 있다. 그래서 하늘이 움직이고 땅이 제자리에 있는 건, 하늘과 땅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연스레 스스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해와 달이 하늘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 즉 낮엔 해가 하늘을 차지하고 밤엔 달이 하늘을 차지하는 것도 모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결과이다. 또 구름과 비와 바람도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모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결과이다. 그래서 천지일월(天地日月), 즉 하늘, 땅, 해, 달과 운우풍(雲雨風), 즉 구름, 비, 바람은 각자 자신들의 의지를 행사하지 않을뿐더러, 또 외부의 어떤 절대적인 힘도 행사할 수도 없다. 그저 무위로서 자연스럽게 움직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런 온갖 변화들이 무위로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데에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장자》는 선진시대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신령스런 무당인 무함초(巫咸)에게 묻고 그를 통해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우리에게 확신을 준다. 무함초는 세상을 다스리는 제왕(帝王)을 통해서 이를 말한다. 하늘에는 동·서·남·북·상·하의 육극(六極)과 목성·화성·토성·금성·수성의 오상(五常)이 있는데, 제왕도 이를 따라야 천하를 편안하게 만들지만 이를 거스르면 천하가 흉해진다. 만약 천하의 움직임과 변화가 일정치 않으면 육극과 오상의 변화를 따르지 않아서이다. 무함초는 <구주(九疇)>와 <낙서(洛書)>의 기록으로 자신의 주장을 보완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정치가 잘 이루어지고, 덕이 잘 갖추어지면 햇빛처럼 온 세상을 ‘자연스럽게’ 환히 비추어 그 결과 세상 사람들이 제왕을 떠받들게 된다. 이런 제왕이 상황(上皇), 즉 으뜸가는 황제이다. 
물론 현실의 정치는 그렇지 않다. 하고자 함이 있는 유위(有爲)가 항상 우선한다. 유위에 입각한 정치의 대표적인 예가 법치(法治)일 것이다. 이를 강조했던 사상가 집단도 있는데 그것이 법가이다. 법치는 춘추전국 시대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의 통치에서 보았듯이 백성이 불편해했음은 물론이고, 진시황까지 옥죄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래서 유가의 인치(仁治)가 한때 빛을 발했던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자는 이런 인치마저 유위로 보아 이를 거부한 것이다. 그런데 장자는 인치마저 왜 유위로 규정하는가? 이에 대한 답이 상(商)나라 재상인 태재(太宰) 탕(蕩)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나타난다.
태재 탕이 장자에게 어짊(仁)에 대해 물었더니 장자는 호랑이나 이리가 어짊이라고 대답했다. 황당한 답변에 놀란 탕이 어째서 그런지 장자에게 다시 물었다. 장자는 호랑이와 이리의 부자(父子)간도 서로 친하니(親) 호랑이와 이리를 어찌 어짊이라 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어서 탕은 태도를 바꾸어 지인(至仁), 즉 지극한 어짊에 대해 공손한 태도로 다시 물었다. 그러자 장자는 지극한 어짊에는 각별히 친하다는 마음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탕은 ‘친하지 않으면 사랑하지(愛)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효성스럽지 않다는데 지극한 인은 불효(不孝)인가?’라고 비꼬아 물었다.
장자는 이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지극한 인은 결코 불효가 아니라 말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극한 어짊은 숭상할 뿐이어서 효성(孝)으론 이 지극한 어짊을 말할 수 없다. 이는 지극한 어짊이 효성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효성이 지극한 어짊에 미치지 못해서이다. 그래서 공경(敬)으로 효도하는 건 쉽지만 사랑(愛)으로 효도하는 건 어렵고, 사랑으로 효도하는 건 쉽지만 부모를 잊기는 어렵고, 부모를 잊기는 쉽지만 부모가 나를 잊게 하기는 어렵고, 부모가 나를 잊게 하기는 쉽지만 천하를 잊기는 어렵고, 천하를 잊기는 쉽지만 천하가 나를 잊게 하기는 어렵다.” 이는 천하가 자연스러움의 으뜸에 있고, 부모, 사랑, 공경, 효성의 순서로 무위의 자연스러움이 덜해 간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효성(孝)·공경(悌)·어짊(仁)·의리(義)는 물론이고 충성(忠)·믿음(信)·절개
(貞)·청렴(廉) 모두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무리해서 덕을 부리는 것이기에 새삼 존중할
게 못된다. 세상에서 지극한 귀함(至貴)은 나라의 벼슬을 물리치고, 지극한 부유(至富)
는 세상의 재물을 물리치고, 지극한 영광스러움(至顯)은 명예를 물리친다고 말하는 것처럼, 무위자연의 도(道)는 효성·공경·어짊·의리, 또 충성·믿음·절개·청렴과는 다
르게 늘 변함이 없이 무위자연한 것이다.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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