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총부

글. 노태형 편집인

모두가 총부만 바라보던 호시절이 있었다.
맛난 것이 있으면 총부부터 먼저 생각했고, 내 살림 어려워도 기꺼이 총부 형편부터 먼저 챙기던 시절. 그러기에 총부의 어린 교무가 출장을 나가면 나이든 교무들은 중앙의 소식을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며 환영했다. 그 시절의 총부는 이정표이자 나침반이었고, 원불교는 작긴 해도 참 행복한 교단이었다.
어느 때인지 모르겠다. 총부 사람들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눈이 멀뚱멀뚱하고, 무언가 곱지 않은 시선이 생기기 시작한 게. 아마 ‘~것들’의 시작이 원천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불평으로 시작됐을 듯한 ‘길 건너 것들(대학을 지칭)’이나 ‘담 밖 것들(기관을 지칭)’등의 농담 섞인 은어가 결국 ‘총부 것들’로 진화(?)한 건 아닐까. 교단이 조금 커지면서 생긴 차별하고 배척하던 말이 자업자득의 빌미를 제공한 듯해 씁쓸하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 일선 교당·기관의 마음이 총부로 향하지 않은 게 이 때문만이겠는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총부는 늘 현장의 ‘답’이었다. 그러기에 총부가 판단오류를 가져오면 교단은 심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중앙총부에는 교단의 중추신경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그곳에서 원불교의 모든 판단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는 서울교구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나라 수도에 위치한 교구이지만, 서울교구의 눈은 항상 중앙총부를 향해 있다. 서울에 주재하는 문화사회부도 최종 판단은 익산 총부에 의지한다. 모두들 총부에서 ‘답’을 구하고 있다.
그러기에 총부가 스마트해야 원불교가 스마트해진다. 총부가 옹색하면 원불교도 옹색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 시대를 생각한다면 교정원을 서울로 옮겨서라도 스마트해져야 답이 나올 것이다.
‘힐링 총부, 스마트 교정원’이라야 호시절을 다시 꿈꿔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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