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정말 도덕적이지 못할까

욕망과 자기이해 상호작용 하면서 부정 에너지 발산…
험담·모함부터 절제하면

인생보다 더 무상한 것이 권력이다. 이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여실히 증명됐다. 그런데 인간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아니 권력의 맛이라도 보기 위해 부나방처럼 뛰어들었다가 정신적·육체적 상처를 입었다.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알면서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 오묘한 맛에 취하고 싶어서…. ‘인간의 어떤 측면 때문에 그럴까?’라고 늘 생각한다. 하지만 딱히 답은 없다. 권력욕이 강한 성향을 가진 사람은 설득도 안 된다. 오로지 가봐야, 경험해봐야, 때로는 당해봐야 느끼고 안다.
모든 현상에는 양면성이 있다. 좋은 면이 있으면 반드시 나쁜 면도 있다. 권력의 오묘한 맛을 보면 반드시 권력의 쓰디쓴 맛도 보게 돼 있다. 권력의 오묘하고 달콤한 맛에 취하기까지, 권력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을까.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저질렀을까. 또 권력을 잡고 나서는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괴로움을 줬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들은 권력을 잡으러 가는 길에 조금이라도 방해물이 나타나면 가차 없이 처단하고, 모함을 하거나 뒤통수를 쳐서라도 제거한다. 이 또한 인간의 어떤 성향 때문일까? 동물적 본성일까, 먹이를 독차지하려는 동물적 본성의 진화의 결과일까? 아무리 깊이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막상 권력을 차지한 인간들도 제대로 사람 보는 안목이 없거나 편협하기는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은 이런 글을 남겼다.
‘不知天下之忠臣者 不可謂之忠(불지천하지충신자 불가위지충) 천하의 충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충성스럽다고 할 수 없고 / 不知天下之賢臣者 不可謂之賢(불지천하지현신자 불가위지현) 천하의 현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현명하다고 할 수 없다.’
임진왜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이순신 장군이다. 그가 선조에게 올린 장계는 워낙 유명해서 많이 회자될 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몇 차례 소개되기도 했다.
‘今臣戰船尙有十二(금신전선상유십이)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남아 있습니다. /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출사력거전칙유가위야)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면 오히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충성스런 이순신도 수차례 모함을 당해 목이 날아갈 뻔한 적이 있고, 옥에 갇히기도, 백의종군 하기도 했다. 왜군과의 해전에서 한 번도 물러서지 않고 패하지 않은 그를 무슨 이유로 모함했을까. 모함한 그 인간들의 눈에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비쳤을까. 그렇게 모함하지 않고는 못 견뎠을까. 인간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든다. 만약 이순신 장군마저 없었다면, 해군마저 왜군에 패했다면 당시 조선은 어떻게 됐을까. 근대 이전에 이미 일본의 속국이 되지 않았을까 우려하는 학자들도 있다.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충성을 다 하고도 모함당한 사람은 비단 이순신 장군뿐만이 아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처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장군과 절친했던 김덕령 장군도 광주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창의를 해서 왜군을 크게 물리친다. 하지만 무고로 참혹한 죽임을 당한다. 반면 경상 감사 김수는 왜군을 피해 늘 도망을 다니면서도 어떻게든 관직은 유지한다. 아마 곽재우 장군의 눈에는 이런 상황 때문에, 천하의 충신과 현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 역시 충신이 아니며 현신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싶다.
대체적으로 모함과 시기를 받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모함과 시기를 하는 사람은 좌고우면 이쪽저쪽 눈치 살피며 상황판단을 해서 살길 찾는 성향을 띤 경우가 많다. 때로는 자기 살길을 위해 주변 사람을 과감히 처단하기도 하고 스스럼없이 무고한다.
얼마 전에는 대학교수가 전혀 하지 않은 성추행을 했다는 대자보가 붙더니, 실제 추행범은 다른 교수였다는 사실이 수사 결과 밝혀졌다. 결국 모함을 당한 교수는 자살하고, 제자와 짜고 무고한 성추행 교수만 구속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왜 인간은 남을 못살게 할까. 피해를 입힐까. 본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아도 없는 말을 만들어내고, 없는 행동을 지어내서 퍼트린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까지 그 허위사실을 알게 된다. 정작 당사자는 전혀 알지 못하고 전혀 상관도 없는 일에 대역죄인이 된 경우가 더러 있다. 
인간의 어떤 성품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지 정말 궁금하다. 단순히 인간의 욕망과 욕심 때문일까. 인간의 그 욕망을 스스로 줄이지는 못할까. 인간은 정말 도덕적이지 못할까. 인간은 도덕이 목적이 되지 못하고 자기이해만이 행동의 준칙이 될 때, 모든 판단 근거를 자기이해의 기준으로 비틀어버리는 속성이 있다. 이번 탄핵사건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이해관계에서 틀어진 파열음 때문에 불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반드시 밝혀져야 할 사건이긴 했지만.
인간의 욕망은 자기이해관계와 상호작용하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 에너지는 본인에게는 긍정이고 발전의 동력이 될지 모르지만 타인에게는 무고와 시기와 모함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 욕망을 적당히 내려놓는 순간 도덕과 정의가 작용하지 않을까? 욕망을 내려놓는 방법으로 남에 대한 평가(주로 험담)를 자제하면 어떨까 싶다.
<대종경> 변의품에서는 ‘그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을 모르는 지라 저의 주견이 완전히 열리지 못한 사람은 함부로 남의 평을 못 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충성스럽고 현명한 사람을 알아보는 최선의 방법은 뭐가 있을까? 우선 남에 대한 험담을 하지 않는 데서 출발해보자. 진정 충성스럽고 현명한 사람을 찾고 싶다면 본인부터 충성스럽고 현명한 방법을 찾아 실천해보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면서 남을 헐뜯는 행동부터 내려놓자. 내려놓은 만큼 또 뭔가 채워질 것이다. 참 인간세상은 오묘하고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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