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불언 언자부지
(知者不言 言者不知)

글. 김정탁

세상에서 도(道)를 얻기 위해 소중히 여기는 건 글인데 글은 말을 넘어서지 못하므로 말이 소중하다. 말이 소중히 여기는 건 뜻인데 뜻은 추구하는 바가 있다.
그런데 뜻이 추구하는 건 말로 제대로 전할 수 없는데도 세상에선 말을 소중히 여겨 글로 전달한다. 세상 사람들이 말과 글을 아무리 소중히 여겨도 나는 오히려 이것을 소중하지 않다고 여긴다. 세상에서 소중히 여기는 건 정말로 소중하지 못하다. 그래서 눈으로 보아 보이는 건 사물의 형체와 색깔뿐이고, 귀로 들어 들리는 건 사물의 이름과 소리뿐이다.
슬프다. 세상 사람들이 형체, 색깔, 이름, 소리로 사물의 참 모습을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저 형체, 색깔, 이름, 소리만으로는 사물의 참 모습을 도저히 터득할 수 없다. 그런즉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세상에서 어찌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이 글은 <장자> 천도(天道)편 마지막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의 핵심은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知者不言),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言者不知).’이다. 이 내용은 <도덕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知者不言 言者不知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粉 和其光 同其塵 是爲玄同. (<도덕경> 56장)
                                     
이 글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감관(兌)을 막고, 심관(門)을 닫고, 날카로움(銳)을 꺾고, 혼란스러움(粉)을 풀며, 빛(光)과 조화를 이루고, 세속(塵)과 함께 하는 걸 일러 현동(玄同)이라 한다.’
언뜻 이해가 안 되므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감각기관과 또 여기를 통해 들어온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심관기관을 닫아야만 현(玄)과 같은(同) 상태에 이른다. 또 날카로움을 꺾고, 혼란스러움을 풀며, 빛과 조화를 이루고, 세속과 함께해야 현과 같은 상태에 이른다. 그러니 현동에 이른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데 반해 말하는 사람은 현동에 이르지 못해 알지 못한다. ‘지자불언 언자부지(知者不言 言者不知)’에 대한 설명이 너무 관념적이어서 여전히 이해가 어렵다. 
이에 반해 장자는 노자에 비해 훨씬 쉽고, 또 실용적으로 ‘지자불언 언자부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다. 이 설명은 춘추전국시대 첫 번째 패자(覇者)였던 제환공(齊桓公)과 수레바퀴 깎는 사람인 윤편(輪扁)과의 대담을 통해 나타난다. 그 대담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환공이 당상에서 책을 읽는데 당하에 있던 윤편이 수레바퀴를 깎다가 환공에게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어떤 거냐고 물었다. 환공이 성인(聖人)의 말씀이라고 하자 윤편은 그 성인이 살아 있는 사람이냐고 다시 물었다. 환공이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자 윤편은 그 책은 고인조백(故人糟魄), 즉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폄하했다. 수레바퀴 깎는 기술자에게 무시당한 환공이 화가 나서 윤편의 주장에 적절한 설명이 있으면 모르지만 없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거라고 협박했다. 이에 윤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수레바퀴 깎는 자신의 일에 비춰 설명하겠다고 했다.
가령 수레바퀴를 너무 깎아 헐거워지면 바퀴가 견고하지 못하고, 덜 깎아 빡빡해지면 바퀴가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헐겁지도, 빡빡하지도 않게 바퀴를 깎는 게 수레바퀴 기술의 정수이다. 이 기술은 손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감응할 뿐 말로는 도저히 전할 수 없다. 그래서 윤편은 자신의 아들에게조차 이 기술을 말로 깨닫게 할 수 없고, 아들 역시 이 기술을 말로 전수 받을 수 없다. 이것이 일흔이 된 윤편이 바퀴를 직접 깎는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옛 사람이 깨달은 바의 진수도 글로는 제대로 전할 수 없다. 그러니 윤편이 볼 때 환공이 읽는 책의 내용은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이다. 
도(道)를 얻기 위해 세상에서 흔히 소중히 여기는 건 글(書)이다. 우리 주위에 수많은 책이 널려 있는 게 그 단적인 예다. 책이 이렇게 많다는 건 세상을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깨달은 바를 글로 남긴 결과이다. 또 사람들은 무언가를 깨닫기 위해 책에 의존한다. 제환공도 나라 다스리는 도, 즉 치도(治道)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이 쓴 책에 의존한 것이다. 그렇지만 글로 전수하는 것보다 더 좋은 건 말로 전수하는 것이다. 말로 표현하는 것 중에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게 많아서이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론 글보다 말이 더 값어치가 있다. 입사시험 등에서 논술보다 면접이 지원자의 능력이나 소양을 보다 심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그렇지만 말도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선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 왜냐하면 머릿속 생각이 너무 복잡하고 주관적이라 말로는 이를 다 담을 수 없어서이다. 그래서 말보다 더 중요한 건 말로 포장되기 이전의 상태 즉 뜻(意) 그 자체이다. 그래서 <주역(周易)>에도 ‘서불진언 언불진의(書不盡言 言不盡意)’, 즉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렇다면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선 뜻(意)이 가장 우위에 있고, 그 다음이 말(言)이고, 글(書)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수단이다.
이를 커뮤니케이션학 전문 용어로 설명하면 뜻은 기의(記意, signified)에, 말과 글은 기표(記表, signifier)에 각각 해당한다. 기의란 외부의 대상에 대해 머릿속에서 그려낸 의미이고, 기표란 그 의미를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 수단 중 대표적인 것이 언어와 문자이다. 우리가 상대방과 커뮤니케이션 할 때는 머릿속의 생각을 언어와 문자로 기표화해서 이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면 상대방은 기표화 된 언어와 문자를 풀어서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을 택한다. 따라서 언어와 문자란 기표는 방편이긴 하지만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선 없어선 안 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런데 말과 글의 중요성을 소홀히 한 채 어떻게 우리는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을까? 아니, 소홀히 하는 건 제쳐두고 말과 글을 아예 무시한 채 내 머릿속 생각을 상대방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수레바퀴 기술자인 윤편은 글로 쓰인 책을 옛사람의 찌꺼기라고 하는 형편없는 평을 왜 내놓았을까? 그것은 말이나 글로 의미가 바뀌는 순간 참된 내용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육조(六祖) 혜능(慧能) 선사가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불립문자란 진정한 깨달음은 문자로서 세울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심전심은 마음을 마음으로 전달한다는 의미이다. 즉 머릿속 생각을 언어화 내지 문자화하지 않은 채 상대방에게 전달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불립문자든 이심전심이든 이 모두는 언어와 문자로선 깨달음의 ‘대충’은 담을 수 있어도 깨달음의 ‘진수’는 담아낼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사람들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로 착각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달을 지시하는 손가락은 달의 대강인 반면 눈에 보이는 실제 달이 달의 진수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시하는 손가락, 즉 언어와 문자에 함몰된 나머지 깨달음의 진수를 맛보지 못한다. 윤편이 제환공에게 충고한 것도 이것이다.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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