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덕꾸덕 마른 메주를 늘어놓고, 장 담그기
구수한 냄새 주렁주렁

취재. 정은구 기자 

남원시 수지면, 몽심재가 있는 홈실마을. 내내 찬바람이 불더니만, 오늘은 볕이 좋다.
오늘이야 말로 장을 담글 수 있겠다며, 박향기 이장이 두 팔을 걷어붙인다. 곧 자갈이 깔린 마당에 자리를 깔고 수레로 메주를 내온다. 귀농을 준비하며 박 이장의 집 한 채를 빌려 살고 있는 부부가 이 모습을 보고 감탄을 한다.  한두 덩이도 아니고 백 덩이가 훌쩍 넘는 터라, 부지런히 손을 놀려야 점심시간이 지날 즈음 마무리가 된다. 오죽하면 부부가 외출을 하고 오는 동안에도 메주 씻는 작업이 끝나질 않았다. “아직도 안 끝났어요?” 놀란 물음에 박 이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는다. “옛날엔 몇 백 개씩 담그느라 하루 종일 씻기만 하기도 했는걸요?”
쩍쩍 갈라진 메주를 다 씻고 나니 어느덧 오후 2시 30분. 소금물을 미리 만들어두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하루 안에 일을 못 끝낼 뻔 했다. 옛날엔 달걀을 띄워서 떠오르는 높이를 보고 염도를 맞췄지만, 행여 맛이 달라질까 싶어 염도기로 정확하게 맞춰둔 참이다. 집에서 먹는 것이라면 상관없지만, ‘몽심재 박씨손맛’이라는 이름을 걸고 판매하는 장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소금물을 만드는 것만도 대여섯 시간이 걸리니, 미리 해두는 편이 작업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이다.
메주가 마르는 동안, 그는 아궁이로 걸음을 옮긴다. 직접 패온 소나무와 참나무로 숯을 만들기 위해서다. 불을 지피고 나무를 넣으면 창고의 고추와 대추를 확인할 차례. 앞마당의 대추나무에서 딴 대추와, 그가 직접 농사짓고 뙤약볕에 말린 고추다. 손수 해나가는 작업은 혼자 하기엔 여간 많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다. 먹는 것만큼은 정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일 년에 한 번 담그는 장이야 오죽할까. 당초 농사일이라는 게 입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한 번에 끝나는 건 없는 법이다.
그가 고향인 남원 수지면으로 귀농을 한 지도 벌써 7년. 본래 광고디자인을 전공했으니, 농사에 적응하기도 녹록지만은 않았다. 첫 농사 때 유기농으로 고추 농사를 짓다가 망치기도 하고, 저염도로 장을 담그다가 모두 상해서 버렸던 적도 있다. 그래도 3년 간 어머니에게 장 담그는 방법을 배웠고, ‘몽심재 박씨손맛’이라는 브랜드로 사업도 시작했다. 전공을 살려서 재능기부로 마을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렇게 노력하니 50여 가구를 돌보는 마을 이장이 되고, 귀농인들에게 강의도 하며 새로운 생활을 이어가게 된 것. 힘든 것이나 돈을 따지자면 시작도 안 했을 것이라고, 그는 종종 생각한다. 17쪽에 다다르는 사업계획서까지 만들었지만, 이제 와서는 그대로 된 게 하나도 없다. 변화무쌍한 환경에 농사일도 좌지우지되는 까닭이다. 당장 어제 소금물을 만들 때만 해도 그렇다.
“소금 농도는 어떻게 맞추는 거예요?” 박 이장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부부가 질문을 한다. “염도기로 하죠. 어휴, 소금 타는 날엔 바람이 어찌나 불던지…. 혼났어요.” 물이 날릴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던 게 어제 일인데, 오늘은 또 이렇게나 해가 쨍하다. 박 이장이 장독 뚜껑을 연다. 장독은 물로 깨끗하게 씻어낸 후, 짚을 태워 소독해야 한다. 물기를 없애고 나면, 이제 바짝 마른 메주들을 차곡차곡 쌓을 차례.
마당에 늘어져 있는 이 커다란 장독들은 일제시대에 만들어져 족히 77년은 되었을 것부터, 최소 50~60년은 된 것들이다. 많이 담글 때는 장독으로만 20개가 넘도록 담기도 했다. 그때는 어찌나 바빴던지, 하루에도 택배가 몇 십 개씩 나가고 명절 때마다 주문이 넘쳤다.
메주를 쌓고, 소금물까지 가득 붓고 나면 숯을 확인할 시간. 부지깽이로 건드려보니, 빨간 불씨를 머금은 숯이 모습을 드러낸다. 타고 있는 숯과 대추와 고추를 소금물 위에 띄우는 작업을 위해 또 한참 아궁이와 마당을 오간다. 그렇게 하길 몇 번. 드디어 장독 뚜껑을 닫을 시간이다. 어느덧 해도 기울어 그림자가 길어졌다.
이제 50일 가량 담가두어야 한다. 한여름을 지나며 소금물 속에서 끓어올랐다 가라앉으며 숨을 쉴 메주를 생각하니 흐뭇하다. 물론 다 담갔으니 이대로 돌아선다고 해서 일이 끝나는 건 아니다. 계속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받아야 맛있는 장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담갔다가 건져서 으깨고 또 숙성시키는 작업이, 된장만 최소 2년이 걸린다. 보통 4~5개월 숙성시킨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된장은 장독에 꽤 오래 잠들어 있는 셈이다. 게다가 생간장도 족히 5년을 숙성시키니, 건강한 먹거리를 만들려는 노고가 남다르다고 자부할 법하다.
신기하게 지켜보던 부부도 집에 들어가고, 하늘이 어둑해지는 시간. 야근이라는 게 거의 없는 시골이라, 그 역시 슬슬 하루를 마무리하련다. 해 떨어지면 집에 불을 켜고,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나 내볼까 싶다.
Ι‘몽심재 박씨손맛’ 박향기 이장(법명 대은, 수지교당) 011-269-9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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