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복수초를 만난 날

글 김광원

나에게는 지금도 생생한 나 혼자만의 소꿉시절 추억이 있다. 그건 다름 아니라 밥이 만들어지는 이치를 발견한 경이감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조그만 사기그릇에 쌀과 물을 넣고 연탄불에 올려놓았는데 잠시 후 그게 몰랑몰랑한 밥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아~ 그 신기함! 나는 지금도 대여섯 살 시절의 그 감동을 잊지 못한다.
나는 아직 콩나물국도 제대로 못 끓인다. 어제였던가. 양파를 대충 크게 썰어 넣고 간장까지 넣었으니 분명 실패한 것 같다. 무엇이든 직접 해봐야 감이 확실히 잡히는가. 수년 전에는 산에 오르다 도토리를 무더기로 만나 배낭에 잔뜩 지고 와서는 한동안 묵혀 놓았는데, 온통 벌레가 먹어 1/3도 못 남았다. 부랴부랴 방앗간에 가서 갈아오고 겨우 도토리묵을 쑬 수 있었다. 작품은 안 좋았지만 무언가 해냈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이렇게 음식 얘기를 하는 것은 홍어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홍어의 삭힌 맛을 알게 되었고 그 매력에 빠지게 된 것이다. 홍콩에서 식신(食神)으로 불린다는 세계적인 미식가 ‘차이란’이 홍어의 그 삭힌 맛을 찾아 매년 한국에 온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충분히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썩어도 썩지 않고 새롭게 태어나는 그 맛은 처음부터 익숙해지는 게 아니다. 인생의 쓴맛을 다수 경험해 본 사람에게 더욱 쉽게 다가올 수 있는 그런 맛이다. 그러다 수년 전 나의 시 ‘홍어꽃’은 태어났다.

그 ‘썩음’을 생각하다가 / 한겨울 지나가네. / 산수유 벌고 / 매화꽃도 화르르 피고 / 개나리, 진달래도 몽실몽실 / 환호하는 백목련을 보며 / 흑산도 수십 미터 / 갯벌바닥에서 너울거리는 / 홍어- 그 썩을 것들! / 어쩌다 그것들은 / 썩어도 썩지 않고 / 썩어서 더 향기로운가. / 온통 골똘하다가 / 그래, 잘 죽은 것이 / 그것도 폭삭 잘 썩은 것이 / 입안도 얼얼하게 코끝을 / 찡- 울리지. / 온 천지에 꽃이 피고 / 하늘하늘 봄 향기 날리지. / 아리고 시린 / 겨울밤이 지나서야 / 지상 최고의 맛! / 홍어꽃 세상이 오지.
- ‘홍어꽃’ 전문

썩으라 해도 썩지 않고 새롭게 변신한 홍어 맛을 겨울 끝에 피어나는 꽃에 비유한 시다. 아니, 썩지 않고 새롭게 변신한 것이 아니라, 사실 씨앗처럼 제대로 폭 썩어야 새싹이 솟아나오는 것이리라. 나는 제대로 폭 썩어 일취월장 변신한 사례로 춘향을 들고 싶다. 암행어사 이몽룡이 걸인처럼 분장하여 한밤중 몰래 춘향을 만나러 감옥에 찾아갔을 때다. 그 거지꼴에 춘향이는 기가 막혔으나, 춘향은 어머니 월매에게 “내 옷가지며 패물을 팔아 거지 몽룡 챙겨주오.” 하고 말한다. 이별 후 원한 맺혔던 마음이 체념으로 변했다가 결국 사랑으로 승화되었으니, 그게 우리 민족의 ‘정한’의 세계다. 그 마음에 이몽룡은 진심으로 반했을 것이다. 그 사랑의 힘은 남원 땅을 밝은 세상으로 바꿔 놓았고, 이 땅에는 다음과 같은 불멸의 시가 남겨진다.

金樽美酒千人血  금술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만백성의 피요,
玉盤嘉肴萬姓膏  옥쟁반의 고운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로다.
燭淚落時民淚落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들의 눈물이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의 소리만 높아 있구나.

변학도가 관장하던 남원 땅이나 현재의 우리 대한민국이나 어쩌면 이렇게도 닮았는가. 세계에서 우리 한민족처럼 부지런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런데도 젊은이나 노인들은 말할 것 없고, 재벌천국 속에서 대부분의 온 국민이 힘들게 버티며 살고 있다. 왜곡되어 내려오는 긴 세월 속에서 한민족의 DNA까지 바뀌고 있는 판국이고, 이젠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 칭하고 있다. 그래도 다행히 지금 이 땅에는 변혁의 바람이 불어 희망을 갖게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 우리 집 강아지 ‘코코’와 함께 차를 몰고 가서 나만이 알고 있는(?) 산속의 복수초를 보고 왔는지 모르겠다. 2월 말 겨울 추위가 머물고 있는 메마른 숲속에서 복수초만 홀로 솟아 노랗게 꽃을 피우고 있었고, 바로 앞에선 계곡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산길을 걷고 호수를 바라보며 나는 오늘 무엇을 그리워했을까. 우리가 정말 꿈꾸는 것은 무엇일까. 어쨌든 오늘 참 기분이 좋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때를 맞춰 복수초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해마다 봄이 오는 길목에 난 그 산길을 거닐 것 같다. 기울어가는 햇살에 호수는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호숫가에서 코코와 나는 아파트 안에서 할 수 없는 신나는 놀이에 한참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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