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일까, 마음일까? 
글. 박정원  월간<산>부장·전 조선일보 기자

인간의 영원히 풀리지 않는 화두는 신(神)에 관한 문제다. 과연 이 지구상에는 신이 존재할까, 하지 않을까? 종교와 과학은 양립할 수 있을까? 신학자와 진화(생물)학자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화두를 가지고 오늘도 각자의 논리를 찾고 있다. 아니 합리화하는 세밀한 논리를 개발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싶다. 
신의 존재유무에 대한 대표적인 주장부터 한번 살펴보자. 유신론자들이 제공하는 논리는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근거는 <파스칼의 팡세(Pense′es, 명상록)>에 나오는 파스칼의 내기다. ‘파스칼의 내기’는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하는 이유를 확률의 기댓값을 이용해서 설명한다. 발생하는 경우의 수는 네 가지다.
먼저, 신의 존재를 믿을 때 두 가지 경우가 발생한다. 첫 번째, 신을 믿는데 신이 실제 존재한다면 인간은 천국에 가게 되는 무한한 이득을 얻는다. 두 번째, 신을 믿는데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득도 없고 기댓값도 없다. 즉 0이다.
반면, 인간이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을 때도 두 가지 경우의 수가 발생한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데 신이 존재한다면 지옥에 간다. 여기서의 기댓값은 무한한 손실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댓값 역시 0이다. 손해도 이득도 볼 것이 없다는 얘기다. 네 경우를 종합할 때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기댓값이 가장 크고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파스칼은 이러한 논리를 ‘신을 믿으라.’는 근거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신을 믿으면 천국에 가고 복을 받는다.’는 유신론적 근거로 가져다 쓴다. 속되게 표현해서 ‘믿어도 손해 볼 것 없다. 안 믿는 것보다 백 배 낫다.’는 논리로 신을 믿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표적 무신론자이며 세계적 지성으로 불리는 진화(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는 그의 책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 ‘신의 존재 여부는 가설이고 논증의 대상일 뿐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에서 주장하는 전지전능한 신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바 없는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것은 우리 교육 체계에 따라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며 불신이 대안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우리는 단지 무언가를 믿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기도의 효과를 근거로 든다. 2006년 미국 심장학회에서는 ‘남을 위해 기도해주는 중보기도의 효과’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 환자 모르게 기도를 해준 환자 등 세 부류를 조사했다. 결과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이 기도의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환자들이 그렇지 않은 환자보다 더 심한 합병증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디킨스는 “자신이 기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 환자들은 스트레스를 더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예로는 종교가 다른 종교에 자행하는 무자비한 폭행과 전쟁, 아동학대와 성차별 등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얼마나 무너뜨렸는가를 지적한다.
또 다른 사례를 한 번 들어보자. 역시 미국에서 실제 무릎 환자를 세 부류로 나눠 실험했다. 한 부류는 실제로 무릎수술을 했고, 두 번째 부류는 무릎관절에 찬 물만 빼내는 수술을 했고, 세 번째 부류는 수술하는 척 하면서 무릎에 전혀 메스를 가하지 않았다. 결과는 어땠을까? 세 그룹 간의 차이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수술을 하지 않은 환자가 1년 뒤 더 자연스럽게 활동을 했다고 한다. 마음작용에 초점을 맞춘 ‘플라시보 효과’를 말하는 것이다. 핀란드 연구진에 의해 조사된 이 연구결과는 지난 2013년 12월 월스트리트저널에 보도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원불교에는 절대 우상이 없다.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강조한다. 처처불상(處處佛像)이고 사사불공(事事佛供)이다. 매사 감사하는 마음과 긍정적인 사고를 가져야 처처불상하고 사사불공할 수 있다. 우상이 없으니 배타적이지 않다. 믿음의 대상이 없는 건 아니다. 굳이 대상을 들자면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의 본원자리, 자성(自性)을 찾는 게 믿음이다. 내 마음을 믿으니 잘못된 우상에 대한 믿음을 가지려 해도 가질 수도 없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통해 종교 르네상스 운동을 벌여야 한다. 중세의 르네상스가 아닌 현대판 종교 르네상스가 절실한 시점이다. 원래 종교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출발한다. 흔히 사랑과 자비라고 한다. 타인이나 타종교를 배척하기 위해 특정 종교가 탄생한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대부분의 전쟁 발단은 종교로 나타났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현실인가. 현대의 종교가 인간을 구원하거나 사랑을 전파하는 이념이 아닌 세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았는지, 종교인들과 성직자들은 심각히 생각해보아야 할 때다. 과연 그런 종교적 가치가 인간의 존엄한 삶의 가치와 부합할 수 있겠는가. 
종교 고유의 가치를 잃을수록 ‘인간은 신이 없어도 충분히 도덕적이고 열정적일 수 있다.’는 무신론적 가치가 세력을 확장해 갈 것이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명상은 그런 현상의 반영일 수도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피에르 신부는 “사람을 굳이 둘로 나눠야 한다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지 말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눠라.”라고 말했다.
내 마음자리를 찾아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원불교인이 되면 어떨까. 이게 바로 힐링이고, 현대판 종교 르네상스 운동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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