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할때 변화를 시도해야

역(易)은 바뀐다,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주역> 계사편에 ‘역은 궁즉변(窮卽變) 하고, 변즉통(變卽通) 하고, 통즉구(通卽久) 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정치며, 경제가 모두 위기이고 또 앞으로의 발전이 불확실한데다가 세계 정세까지 그렇다 보니 ‘궁하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위기다.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 걱정스럽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궁즉변, 이렇게 모든 게 궁할 때 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회사를 경영하시는 분들은 회사가 궁하거나 위기상황이 되면 ‘이걸 어떻게 탈출할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면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 변화를 시도할 것입니다.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궁에 머물러있기만 하든지, 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거길 넘어설 수 없게 됩니다. 반드시 변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렇게 변화를 위해 애를 쓰다보면 ‘변즉통’ 하게 됩니다. 통이라는 것은 형통해진다는 뜻입니다. ‘아, 이거 됐다.’ ‘아, 이 길로 가면 되겠구나.’ 하는 것들이 보이면서 길을 잡고 나아가다 보면 거기에서 부(富)도 생기고, 만족도 생기고 형통해지면서 마침내 ‘통즉구’ 하게 됩니다.
구(久) 자는 오래간다는 뜻입니다. 이 형통이 오래가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구(久)가 됩니다. 그런데 이 구는 오래되면 다시 궁해지는 것이 이치입니다. 그래서 주변과 함께 잘 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권독한(獨權獨恨)이라고, 권한을 홀로 가지면 나중에 어려운 일을 맞이했을 때 혼자서 원망을 다 감당해야 합니다. 내면적으로 자기 영역에서 성공하기 위한 애를 쓰기도 해야 하지만, 그 부를 주변에 나누어 주기도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 더 잘 되지 않겠느냐.’며 고를 함께 나누는 동고(同苦)는 잘하지만, 일이 성공하고 좋은 성과를 거두었을 때 그 즐거움을 나누는 동락(同樂)은 잘하지를 못합니다. 낙을 가졌을 때 그 낙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어야 도인입니다. (102. 01. 07 원경영인회 접견)


우리는 어느 한쪽에 서서 정치적으로 참여하는 일을 주의해야 합니다. 성직자의 본령을 잊고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지 않도록 중립을 잘 지켜야 합니다. 종교가 가진 품격, 도덕성, 중립성들을 잘 지키고 유·불리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재가교도들이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문제는 각자의 정치적 소신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그것까지 개의할 일은 아니지만, 재가교도의 경우에도 원불교라는 이름으로 참여를 하는 경우에는 더욱 조심하고 주의시켜야 할 일입니다. 특히나 정치의 계절이 될 때는 세상 사람들처럼 부화뇌동(附和雷同)하거나 부적절하게 참여함으로써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더욱 유의해야 합니다.
대종사님께서 정치는 법률을 중심으로 해서 민중을 다스린다는 면에서 아버지의 역할 같고, 종교는 따뜻하게 보듬고 용서하는 모습을 갖고 있어서 어머니의 역할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종교와 정치가 할 일을 엄격하게 구분을 해놓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정교동심(政敎同心), 종교와 정치가 동심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이 동심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얼마나 적절하게 동심하고 합력할 것인가 하는 것은 사안에 따라 잘 조절되어야 합니다.
대종사님께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동심이 되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함께 번영을 누려야 한다.’는 제안을 해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생각이 요즘 더욱 새겨집니다. (102. 02. 07 각단회)
 대종사님께서는 앞으로의 세상을 놓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앞으로의 세상에 더욱 큰 삶의 지표가 될 것입니다. 생각을 잘 한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생각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생깁니다. 보통은 눈으로 보이는 현상만을 놓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 현상 뒤에 숨은 그 무엇이 있습니다.
‘사·승·마(蛇繩麻)’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원을 지나다가 나무 밑에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관리자에게 “이런 곳에 뱀이 있으면 어떡하냐!”고 따졌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뱀이 아니라 노끈 뭉치였다고 하죠. 그리고 그 노끈은 여러 개의 마 가닥을 꼬아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뱀 사(蛇), 줄 승(繩), 삼 마(麻) 자를 써서 사물을 파악할 땐 나의 경험이나 선입견에 한정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자세히 봤더니 이렇더라.’ ‘자세히 분석해봤더니 여러 요인이 있어서 그런 것이더라.’ 하는 깊은 사유와 깊은 생각을 할 줄 알아야 미래 세상에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선입견 없는 정신이야말로 온전하고 깨끗한 정신입니다. 일을 감정적으로 한다든지, 선입견에 의해 하면 늘 뒤틀리고 괴롭습니다. (102. 01. 04 원창학원 신년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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