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보찰(天府寶刹) 변산에서
개벽회상의 미래를 구상하다

글. 박윤철

일찍이 고려후기의 문장가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1199년 9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전주 일대를 유람하고 나서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라는 기행
문을 남긴 바 있다. 이 기행문은 그의 시문을 모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23과 <동문선(東文選)> 권66에 실려 있다. 이 기행문에 의하면, 1199년 12월에 이규보는 부안 변산으로 벌목하는 일을 감독하러 갔다가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는다.

변산은 예로부터 천부라 일컬으니(邊山自古稱天府)
좋은 재목 가려내어 동량으로 쓰리라(好揀長材備棟樑)
      
이것이 ‘천부(天府)’ 변산의 유래이다. 한편 조선전기 사림파(士林派)의 원조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역시 변산에 대한 시 한 수를 남겼으니,

울창한 좋은 재목 일천 봉우리에 모여 있고(鬱鬱珍材千合)
그윽한 보찰들은 뭇 마구니들도 안다네(眈眈寶刹衆魔知)
 
김종직의 시에는 변산에 ‘보찰(寶刹)’ 즉 유명한 사찰이 많다고 나온다. 변산은 예로부터 ‘보찰’의 땅으로 유명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변산에는 과연 어떤 ‘보찰’들이 있었을까?
주지하듯이, 소태산 대종사는 1919년 음력 10월 20일 구인제자의 1인인 오창건(吳昌建)을 대동하고 ‘천부보찰’의 땅 변산으로 입산(入山)을 단행한다. <불법연구회창건사>에서 밝히고 있는 입산의 이유는 첫째 오랫동안 복잡한 정신을 다시 휴양하기 위함, 둘째 재래 불법의 교리와 제도를 실지 참고하여 장차 혁신할 본 회(會)의 교리와 제도를 초안하려 하심, 셋째 사방에 있는 인연을 서로 연락하여 장차 회문(會門) 열 준비를 하기 위하심, 넷째 분망한 세상에 또한 중인(衆人)의 지목을 피하기 위하심이라 밝히고 있다. 이 네 가지 입산 이유 가운데 하나인 ‘재래 불교의 교리와 제도를 실지 참고하여 장차 혁신할 본 회의 교리와 제도를 초안’하는 데 있어 ‘천부보찰’의 땅 변산은 천혜의 조건을 갖춘 땅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변산은, ‘불법(佛法)으로 주체’를 삼은 개벽회상의 사상적 기초가 될 재래 불교의 교리와 제도를 참고하여 장차 세계의 주교(主敎)가 될 새 회상의 교리와 제도를 초안하는 데 있어 안성맞춤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대종사께서 입산하여 주석하실 당시, 즉 1920년대 변산의 ‘재래 불교’는 과연 어떤 상황에 있었을까? 이번 호에서는 종래 월명암과 백학명 스님 중심의 이야기에서 탈피하여 ‘천부보찰’의 변산에 숨어 있는 개벽회상 원불교의 또 하나의 연원(淵源)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1920년대 전후 변산의 ‘재래 불교’ 상황을 알려 주는 자료로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것이 바로 <심춘순례(尋春巡禮)>이다. 이 책은 36세의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1957)이 56세의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1870~1948) 스님의 안내로 1925년 3월 28일부터 50여 일간 호남 서해안과 지리산 일대의 사찰을 순례하면서 그 순례기를 <시대일보(時代日報)>에 연재하고, 1년 뒤에 기행의 전반부를 모아 <심춘순례>라는 제명으로 간행했다. <심춘순례>는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었다. 제국주의 일본에 빼앗긴 조국의 산하와 사찰을 중심으로 살아 숨 쉬고 있던 한민족 고유의 신앙과 설화 등이 육당의 유려한 문체를 통해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다. 또한 육당이 몸소 걸었던 산하와 사찰의 모습 등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전개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심춘순례>가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1920년대 호남 서해안 일대의 산하와 그곳의 사찰 및 그곳에 전승되는 민중 신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될 필독서라는 점이다. 저자 육당은 50여 일의 여정 대부분을 걸어 다녔다. 김제 모악산과 부안 변산(봉래산), 정읍 내장산과 고창 선운산, 지리산 등 높은 산을 거침없이 넘었다. 그야말로 온 몸으로 보고 듣고 겪은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이 <심춘순례> 제12장에서 14장까지를 보면 ‘천부보찰’ 변산의 ‘재래 불교’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다. 이 기록에는 소태산 대종사와 인연을 맺는 또 한 분의 고승 한만허(韓滿虛, 1856~1935) 화상에 관한 내용도 나온다. 육당은 1925년 4월 5일 밤에 내소사(來蘇寺)에서 만허 화상을 만나 ‘불법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썼다. 그러므로 1919년 늦은 가을에 대종사께서 변산에 입산하여 만허 화상을 만났다면 화상의 나이 64세, 대종사 29세 때의 일일 것이다. 육당은 말한다.

만허 화상은 10여 세에 이 절에서 출가한 이래 근 60년 동안 머물러 거의 변산의 주인이 된 것이다. 더욱 절의 운이 좋지 아니하여 오랫동안 땡초들의 소굴로 공적인 일이라 하면 소 잡아먹는 일, 누구 두들겨주는 일이나 하던 곳이었다. 절이나 승려 사이에는 정당한 왕래조차 없어진 화외지(化外地; 부처님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는 땅)이던 곳을 만허 화상이 적의 말을 타고 적을 내쫓는 식의 비상한 고심으로 이 따위 무리를 내쫓고 법계의 청정을 회복하여 마침내 소래(蘇來; 내소사)로 하여금 오늘날의 지위를 얻게 한 것은 실로 근래 드물게 만나는 뛰어난 업적이라 할 것이다.(최남선 지음, 심춘독회 엮음 <쉽게 풀어 쓴 심춘 순례>, 전주 신아출판사, 2014)

위 내용에 의하면, 일찍이 황폐화되어 있던 내소사를 청정도량으로 회복, 중창한 주역이 바로 만허 화상이었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만허 화상의 중창불사는 내소사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만허 화상은 속인들에게 강탈당했던 실상사(實相寺)의 토지를 찾는 일에도 혼신의 정성을 기울였다. 불교계에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만허 화상의 지극 정성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이 빼앗아갔던 땅을 자발적으로 돌려주었다고 한다.
또한 만허 화상은 내소사에 선원(禪院)을 개설하고 관해(觀海) 선사를 조실로 추대하여 후학 양성에 힘쓰는 한편, 화재로 소실된 월명암(月明庵)을 학명 스님과 함께 복원하는 데도 전력을 기울였다. 1856년 전남 남평에서 출생한 만허 화상은 어려서 부친을 여읜 뒤 1868년 13세 때 출가, 30세 때인 1885년 관해 선사의 법을 이었다고 전한다. 요약하자면, 만허 화상이 일생을 기울여 중창한 내소사, 실상사, 월명암 등이 자리하고 있는 ‘천부보찰’의 땅 변산으로 입산한 대종사께서는 만허 화상 및 학명 스님 등과 교류하면서 ‘재래 불교’의 교리와 제도에 대한 연구, 개벽회상 원불교의 교리와 제도 초안 작업에 전념하실 수 있었다.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