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가 말하는 대종사(大宗師)의 구체적인 모습
글. 김정탁

지난 달 글에서 대종사를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구현하는 사람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제부터 대종사가 어떤 사람인지 예를 들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첫 번째 예는 순(舜)임금을 통해 드러난다. 순은 요(堯)임금의 신하 시절 천왕(天王), 즉 하늘의 왕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고 질문한 바 있다. 이에 요임금은 자신의 치세관을 통해 대답한다. 즉 힘이 없는 사람은 깔보지 않고, 가난한 백성은 내치지 않고, 죽은 자는 애통해 하며, 갓난애는 가상히 여기고, 과부는 애처롭게 여기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순은 요임금의 마음 씀(用心)은 좋기는 하지만 훌륭한 것 같지 않다는 의외의 평을 한다.
순은 요임금의 마음 씀에 대해 왜 이렇게 인색한 평가를 내린 걸까? 한마디로 요임금의 마음 씀이 인위부자연(人爲不自然) 하다고 판단해서다. 순이 보기에 하늘의 덕(天德)이 있으면 땅은 저절로 편안하고, 해와 달이 만물을 제대로 비추면 사철은 올바로 운행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밤낮의 교대엔 일정한 규칙이 있고, 농업생산의 핵인 비는 구름이 만들어지면 당연히 내린다. 이렇듯 모든 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므로 특별히 애를 써서 힘이 없는 사람은 깔보지 않고, 가난한 백성은 내치지 않는 식으로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 이 말에 부끄러워진 요임금은 자신의 마음이 혼란스러워 잠시 어지러워졌다는 핑계를 대며 ‘자신은 사람과 영합하지만(人之合), 순은 하늘과 부합한다(天之合)’면서 순을 한껏 추켜올린다.
장자는 이 예를 통해 천지의 자연스러움은 옛날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다고 여겼고, 또 황제(黃帝)와 요·순 양 임금도 좋게 여겼다고 주장한다. 이런 자연스러운 마음 씀은 왕이 될 경우 그의 치세 방법과 곧바로 연결된다. 그래서 옛날에 천하를 다스렸던 왕들은 무위자연에 입각해서 천지를 따를 뿐, 유위부자연한 인위적 치세를 멀리했다. 
두 번째 예는 노담(老聃)을 통해 드러난다. 노담과 노자가 같은 사람인지 여부는 오래된 논란으로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 여기선 두 사람을 구분해서 다루려는데 이어서 노자란 인물이 등장하는 글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노담은 주(周)나라 왕실의 서고 관리인이다. 이 사실에 주목한 공자는 노담을 찾아가 자신의 저서인 육경, 즉 시(詩), 서(書), 예(禮), 악(樂), 역(易), 춘추(春秋)를 왕실 서고에 소장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노담이 책의 소장을 허락하지 않자 공자는 되풀이하며 설명하면서 애걸하다시피 했다. 이에 노담은 설명이 번거롭다며 책들의 개요만 얘기해 달라고 요청하고, 공자는 인의(仁義)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담은 인의가 사람의 타고난 본성(性)인지의 여부를 물었다. 이에 공자는 군자(君子)는 어질지(仁) 않으면 그 삶이 이루어지지 않고, 의롭지(義)않으면 살아가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인의는 진인(眞人), 즉 참된 사람의 타고난 본성임을 아울러 강조했다. 그러자 노자는 인의(仁義)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공자는 만물을 즐거운 마음으로 대하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면서 사사로움이 없는 게 인의의 자연스런 모습(情)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노담은 인의에 사사로움이 없다는 건 매우 위험한 말이라며 제동을 걸었다. 노담이 볼 때 사사로움이 없다는 생각 자체가 사사로워서다. 나아가 차별 없이 사랑한다는 겸애(兼愛)도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라고 반박했다.
이렇듯 노담의 눈에 공자란 인물은 세상을 이끄는 목자(牧者)와 같았다. 그렇지만 진정한 목자가 되고자 하면 천지에는 본디부터 일정한 법칙(常)이 있고, 해와 달은 본디부터 밝음(明)을 지니며, 수많은 별은 본디부터 하늘에 즐비하고(列), 짐승은 본디부터 무리(群)를 이루며, 나무는 본디부터 꼿꼿한 세움(立)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는 게 장자의 생각이다. 이것이 자연의 덕(德)을 본받아 행동하고, 도(道)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인의(仁義)를 억지로 내세우고 북을 치며 요란하게 하면서 잃은 자식을 찾듯 매진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공자에게 반문했다. 노담이 볼 때 이것들은 사람들의 타고난 본성(性)을 어지럽힐 뿐이다.    
세 번째 예는 노자(老子)를 통해 드러난다. 사성기(士成綺)는 노자에게 가르침을 얻고자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는데 아무런 가르침을 얻지 못하자 투덜대었다. 자신처럼 어리석은 사람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 걸 보니 노자가 성인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노자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낙담하여 일단 물러난 뒤 다음날 아침 다시 노자를 찾아갔다.
그런데 어제와는 달리 사성기에게 투덜거리는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면서 노자에 대해 존경스런 마음이 절로 생겨났다. 사성기는 스스로 놀라 어찌된 일인지 물었다. 노자는 무슨 말을 들어도 상관없다면서 당신이 나를 소라고 부르면 소로 여기고, 나를 말이라고 부르면 말로 여긴다는 심정을 담담히 피력했다. 그렇지만 정말로 소인데도 소라고 이름 붙여지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화를 거듭해서 입게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에 감동을 받은 사성기는 신을 신은 채 노자가 거처하는 방안으로 그대로 들어가 수신(修身)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간곡히 물었다. 이에 대한 노자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사성기의 얼굴이 날카롭고, 눈은 상대방을 쏘아보는 듯 하고, 이마는 반들거리며, 입은 싸울 듯하며, 모습은 의연하게 보여서이다. 이런 모습은 마치 말이 매여져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사성기는 말처럼 매여져 움직이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지만 일단 튕겨져 나가면 쇠뇌처럼 빠르다. 게다가 사물을 살피면 꼼꼼히 파악하고, 지혜와 재주를 믿고 방자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인다. 이것들은 참되지 못하다. 노자는 변방 끝에 이런 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이름을 도둑(竊)이라 칭했다. 사성기에 대한 엄청난 모욕인 셈이다.
물론 사성기는 가공의 인물이지만 그 이름에서 ‘유가의 덕목을 화려하게(綺) 이룬(成) 선비(士)’를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노자는 이 글을 통해 유가의 유위에 입각한 덕목, 즉 인의예지 등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무위자연에 입각한 덕목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제 노자는 왜 그런지의 이유를 이어서 설명한다. 노자에 따르면 도(道)는 큰 것에 의해 없어지는 일이 없고, 그렇다고 작은 것에 의해 버려지는 일이 없기에 모든 만물은 도를 제각각 갖추고 있는 셈이다. 즉 여여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 자체가 자연스러운 존재이므로 각자가 도를 갖추고 있다. 게다가 도는 넓고 또 넓어 그 안에 모든 걸 담을 수 있고, 깊고 또 깊어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다. 도의 이런 신비로운 작용에서 보면 유가의 덕목인 형덕(形德)과 인의(仁義)는 말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지인(至人), 즉 지극한 사람만이 말단인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어 이 세상에 지인이 있다는 건 일단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지인은 자신이 세상에 처해 있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모두가 권력을 두고 다투더라도 지인은 여기에 휩쓸리지 않고, 또 의지할 곳이 없음을 확실히 알기에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고, 또 사물의 진면목을 깊이 체득하기에 근본을 지킬 수 있다. 그 결과 지인은 천지를 도외시하고, 만물을 버리더라도 그의 정신만큼은 어떤 곤란함을 겪지 않는다. 도(道)와 통하고, 덕(德)에 합일하여 인의(仁義)를 물리치고, 예악(禮樂)을 멀리하니 지인의 마음은 안정되어 있을 뿐이다. 유가가 강조하는 대표적 덕목인 인의와 예악은 장자의 눈엔 이처럼 하찮은 것이다.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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