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교당에서의 30일 

글. 장제희

하와이다! 천국 같은 곳이다.
남동생이 이민을 갔고, 나는 그 덕에 아들을 하와이로 유학 보내게 됐다. 해마다 겨울방학이면 아들을 만나러 하와이를 찾게 되는데, 지인들은 이런 나를 몹시 부러워들 한다.
올해에는 원불교 하와이교당과의 인연으로 호놀룰루에서 지내게 되었다. 기껏해야 원불교를 상징하는 동그란 원만 아는, 원불교에 관해 무지한 나다. 교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기꺼이 받아준 원불교 측의 열린 처사에 감사하며 들뜬 맘으로 하와이로 날아갔다. 관광객들은 바닷가인 와이키키 지역에 몰려들지만 현지인들은 마노아산 쪽을 선호한다. 무엇보다 조용하고 살기 좋은 곳인데, 마침 원불교 교당은 마노아산 언저리 주택가에 위치해 있었다.
교당 바로 앞엔 바로 버스 정거장도 있어 시내에 나가기도 편리했고, 무엇보다 내가 원했던 건 바로 템·플·스·테·이!
나이 오십을 넘겼는데 사람의 일에 중심을 못 잡고 사소한 일에도 흔들리고, 작가랍시고 글 부담만 지닌 채 책과 글을 데면데면했다. 연말엔 시국도 뒤숭숭, 위정자에 대한 실망감은 세월호 사건에 버금가는 무력감과 우울감으로 다가왔다. 템플스테이를 통해 새로운 맘으로 리셋하고 서울에 돌아오고 싶었다. 원불교에 대한 호기심도 컸더랬다.
교당의 하루는 새벽 5시 30분 교무님의 목탁소리로 시작되어 저녁 9시 저녁 심고 시간으로 조용히 마쳐졌다. 교무님은 마치 방송사의 프로듀서처럼 교당의 기본 일정을 계획하고 교도들에게 좋은 정보, 대개 이민자들인 교도들의 애환을 달래주려 다양한 프로그램을 짜고, 홀로이 큰 교당을 관리하느라 불철주야 애쓰셨다. 나는 새벽 예불과 저녁 심고에 동참은 안 했으나, 발걸음 숨소리 모두 조심하며 명상과 독서를 위주로 즐겁게 지냈고, 일요일 아침에 열리는 법회엔 꼬박꼬박 참여했다. 교무님을 통해 입교를 권유받았으나, 그저 이름만 알고 친구가 될 수는 없는 법! 제대로 <원불교 교전>을 접해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교당을 떠나온 지금도 새벽이면 들려오던 교무님의 단호한 목탁소리며 법회 시간에 울리던 웅숭깊은 경종소리(처음 보고 들어본 경종이었다.), 교당 식당에서 교무님, 교도님들과 두런두런 이야길 나누다 발견한 하와이의 상징 쌍무지개, 예쁜 정원…. 이 모두가 눈과 귀에 밟힌다.
아쉬운 일은 하와이교당이 지어진 지 20년이 되어 (원불교가 일찍이 해외포교에 눈을 돌리고 힘쓴 점이 적잖이 놀라웠다.) 교당 리노베이션 공사로 인해 교당을 나와야 했다는 점이다. 성공적인 템플스테이를 꿈꾸던 내겐 실망스런 일이었지만 오늘도 교당을 위해 애쓰는 교무님과 교도님들! 그들을 큰 뜻을 알기에 개인의 소망은 접고 교당을 떠나왔다. 올 겨울 다시 하와이에 가게 된다면 더 멋지게 단장된 교당에서 몸과 맘을 힐링하고 싶다. “교무님! 저 또 받아 주실 거죠?”


말해 뭐해? 즐거운걸!

글. 김보성

“나는 태어나서 지금이 제일 설레요. 미인이랑 같이 있는데 불 꺼지기 바로 직전.”
2016년 대한민국 여심을 홀린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주인공 ‘유시진’의 대사 중 하나이다. 대한민국 여심을 홀린 유시진 대위는 우리 엄마 마음까지 홀딱 훔쳤다. 태어나서 엄마가 아빠가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것을, 나는 29년을 살면서 처음 봤다.
엄마는 안방에서 항상 ‘태양의 후예’를 틀어 놓고 몇 날 며칠을 보셨다. 엄마와 함께 하는 식사자리는 송중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어디 지역 출신인지, 송중기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돼버렸다.
엄마는 “송중기를 볼 때마다 현금 500만 원을 받는 기분이야. 그만큼 마음이 풍족하고 행복해.”라며 무지 행복해하셨다. 동생과 나는 ‘송중기가 진짜 돈을 준 것도 아닌데 저렇게 행복해하실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는 송중기의 대만 팬미팅 현장을 모바일 동영상으로 보시고 “굳이 비행기표 사서 시간을 내 대만을 가지 않아도 동영상으로 현장을 알 수 있으니 참 고맙네!”라며 대만에 직접 다녀오신 듯 기뻐하셨다.
정말 송중기를 볼 때마다 500만 원의 행복을 받는 기분일까? ‘내가 그렇게 사랑하던 남자친구를 볼 때마다 500만 원을 받는 행복을 느꼈을까?’ 싶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나 역시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감정과 만족에 대해 스스로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거나 환산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았을 뿐, 엄마가 느끼는 감정과 기쁨은 같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 행복을 알아차리고 감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듯 우리 엄마 애경 씨는 매사에 감사생활과 기도생활을 하며 항상 크게 웃는 밝디 밝은 분이다.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도, 아빠가 크게 다쳤을 때도, 엄마는 웃으면서 손님을 맞이하고 나와 동생에게 크게 화도 내지 않으셨다.
‘그래, 그런 거야. 어찌됐건 즐겁게.’ 엄마가 큰 경계를 당했을 때 취사하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감상이다. 흉한 일을 당할 때 길한 일을 생각해서 감사하고 웃으며 지내고, 기쁜 일을 당하면 더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그와 관련된 모든 일에 감사하는 우리 엄마 애경 씨.
교당에 엄마를 아는 교도님이나 다른 엄마의 지인들께서 내가 엄마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있다. “애경 씨를 닮아서 이렇게 밝구나.” 이전에는 그 말씀들을 들을 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지만 우리 엄마 애경 씨의 전매특허 ‘밝음’을 닮았다는 것은 엄청난 칭찬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500만 원을 진짜 받지 않아도 받은 것 같은 기쁨! 우리 엄마 애경 씨의 기쁨과 행복을 알게 되니 송중기 씨 자체가 동포은이며 은혜의 산물이다. “감사합니다. 유시진 대위 송중기 씨!”


기차 등굣길

글. 이보영

사실 한 번도 생각하거나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다. 경남 진주에 살고 있는 내가 전북 김제에 있는 학교를 다니게 될 줄, 그래서 기차가 내 통학수단이 될 줄.
나는 기차를 타본 경험이 아주 적다. 프리패스권으로 친구와 여행을 갔을 때 말고는 한 번도 없었을 정도다. 그래서 새로 단장한 진주역이 매우 낯설었고, 처음 혼자 오르는 기차가 어색했다. 함께 가는 이가 없는 먼 길, 학교로 향하는 그 세 시간은 고요하고 평온하다.
기차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은 자는 것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창밖 풍경을 구경하는 것이다. 더 큰 도시만 내다보고 찾아가던 내가 이름부터 생소하고 집이라고는 몇 채 없는 역을 여러 개 지나가면서 보는 건 굉장히 티끌만한 것들이다. 하늘이 푸르다든가, 구름이 빠르게 흐른다든가. 그러다 보면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가 괜히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햇볕에 바싹 말라가는 물방울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는 축 처진 회색 하늘 아래 젖어 짙어진 녹색 논도 보았고, 기차 창을 집적대고 지나가는 나뭇가지도 있었고, 조그마한 마을 모습도 있었더랬다. 앞자리에 앉아 창가를 만지작대는 아가의 손도 있었고, 자는 중에도 찌푸린 얼굴을 펴지 못하는 가장의 얼굴도 있었다. 새로운 곳으로 가는 기쁨에 들뜬 소녀들도 있었고 그 공간엔 나도 있었다. 창 밖 풍경에 어떤 집을 그려 넣으면 잘 어울릴까 고민하는 나도 있었고, 언제쯤 내릴 수 있을까 하고 지도에서 방금 지나간 역 이름을 찾는 나도 있었다.
어쩌면 굉장히 의미 없는 시간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저 흘려보내버릴 풍경들과 기억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다. 하지만 기차에 몸을 실은 그 순간부터, 짐을 옆에 내려두고 의자에 등을 기대앉은 그때부터, 입을 꾹 다물고 눈동자만 굴리는 그 시간 속에서 어쨌든 나는 도착역을 향해 가고 있다.
정적인 공기를 느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바라본 순간 대부분은 지나가는 세상의 아름다운 분자들이었고, 세상을 움직이는 작은 기관들이었다.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기차 속 내 행동들에서 나는 항상 세상 속에 머물고자 하는, 그 속으로 힘차게 뛰어가고자 하는 나를 발견했다. 결국 나도 세상의 아름다운 분자이며 세상을 움직이는 작은 기관인 셈이다.
내 작년 한 해는 그 어떤 해보다 열정적인 동시에 좌절스러운 시간이었다. 내가 갇힌 세상을 여러 번 뒤집어보려, 고쳐보려, 뭉개보려 했지만, 세상의 벽에 다가가 손을 데이고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썩어 부실해진 그 낡은 벽 너머로 저마다 빛을 내는 색이 가득하고 바람이 불며 물이 흐르는 숲을, 나는 볼 수 있었다.


극한직업, 취사병

글. 최홍식

새벽 세 시 반,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밥을 짓는 시간이 찾아왔다. 200인분의 밥통에 물을 조절하고 반찬을 삽으로 몇 번 젓다 보면, 어느새 아침식사 시간이 가까워온다. 점심식사를 준비하기 전까지 얼마나 쉴 수 있는지와 함께 남은 제대일도 무의식적으로 계산해본다. 주방에서 일을 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하다가, 취사병 생활을 시작한 지 일 년의 시간이 훌쩍 흘렀다.
처음 취사병으로 배치를 받았을 때는 내가 취사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는 요리 경력자도 아니고, 조리학 비슷한 걸 전공하지도 않은 평범한 공대생이었다. 남들은 훈련 안 하니 좋지 않느냐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 나는 차라리 훈련을 받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픈(웃기지만 슬픈) 얘기지만 처음에는 훈련 받는 동기들의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곤 했고,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보직을 바꾸고 싶다.’며 한 시간 넘게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기를 두 달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인지하고 조용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현실을 인정했다고 해서 조리 실력이 갑자기 좋아질 리 없었다. 한 번은 명절 기념으로 떡국을 만든 적이 있는데, 부대 사람들 대부분이 버리는 광경을 봤다. 내가 먹어봐도 간이 한참 맞지 않았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지만 직접 만든 것들이 버려지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잔반을 치우면서 이전의 나답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밥을 먹다가 남겼을 때 엄마도 그런 심정이었을까?’
문득 집에서 엄마에게 반찬 투정을 하면서 밥을 자주 남기던 일들이 떠올라 미안했다. 그런 마음의 상처로 힘든 와중에도 다행이었던 점은, 선임들이 크게 혼을 내거나 별다르게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런 배려 때문에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일에 적응할 수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 늦은 저녁까지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은 힘들다. 과제 치르듯 매일, 매 식사를 챙기곤 한다. 저녁 식사 준비를 끝내고 주방을 정리한 후 잠시 생각한다. ‘오늘도 무사히 일과를 마쳐 다행’이라고. 하루하루 큰일 없음에, 간이 맞지 않거나 덜 익은 식사를 묵묵히 견뎌준 선임과 부대원들에게, 내 반찬투정을 받아주던 엄마에게, 그리고 보이지는 않는 곳에서 땀 흘리는 농부들에게 감사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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