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인쇄물을 위해 모인 수십 명, 인쇄소
24시간 풍겨오는 종이냄새 

정은구

윙윙 울리는 기계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옆 사람의 말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소음에 종이분진이 날리는 기계실. 오정운 기장이 야간 조와 교대를 한다. 각종 장치 상태 모니터를 확인하고, 인쇄물을 이어받아 작업하는 아침. 성수에 위치한 문덕인쇄의 인쇄기계 2호기가 분주하게 인쇄물을 찍어낸다.
오 기장은 출력실에서 인쇄해준 네 개의 동판을 기계에 끼워 넣는다. 날씨나 온도에도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인쇄기계. 비행기 다음으로 정밀하다고 한다니, 데이터에 맞게 기계의 기능을 조정하는 작업도 세밀해질 수밖에 없다. 높이 쌓인 종이가 빠르게 빨려 들어가면 인쇄 내용이 찍힌다. 검은색과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의 잉크가 알코올, 물과 적절한 비율로 섞여 종이에 찍히는 과정이다. 겉으로 보기엔 크고 투박해 보이는 기계인데, 어찌나 예민하고 복잡한지…. 오 기장은 돋보기를 들어 인쇄물을 면밀하게 살핀다. 기준점으로 표시된 원 안의 색깔이 미세하게 어긋나 있으면 전체적인 인쇄물의 색이 이상해진다. 때문에 0.01mm라도 틀리면 안 된다. 몇 번이나 색을 확인하고 농도를 맞추는 그의 손길을 따라 모니터 속 수치도 부지런히 바뀐다.
인쇄물을 확인하던 그가 종이 위에 찍힌 스크래치를 발견한다. 동판에 흠집이 난 것. 작은 흠집이 나거나 먼지가 묻으면 인쇄물에 여과 없이 드러난다. 벌레가 많은 여름에야 말할 필요도 없다. 오 기장이 기계를 잠시 멈추고 뚜껑을 연다. 맞물린 롤러 사이에서 동판의 기스를 찾아 약품으로 닦아내고 나면, 인쇄물은 다시 깨끗하게 인쇄되기 시작한다.
“진행은 잘 되고 있어요?” 부산한 기계실에 박종하 회장이 들어섰다. 작업 진행 속도를 확인하고 상황을 보는 것이다. 서울과 파주 두 군데에 인쇄소가 있다 보니, 작업물을 적절하게 배분하는 작업은 아주 중요하다. 오 기장에게 현재 작업의 예상 종료 시간을 확인한 박 회장이 바쁘게 중철 제본 과정을 살피는 동안, 오 기장도 기계 주변을 부지런히 오간다.
예전에는 위험한 경우도 많았다. 동판 하나를 갈아 끼울 때조차 수동으로 작업해야 했기 때문이다. 롤러가 돌아갈 때 옷이나 신발, 머리카락 등이 말려들어가는 경우가 생긴다. 묵직한 기계가 발등에 떨어져서 다치는 경우도 있다. 그나마 요즘 기계엔 안전장치 센서가 많이 달려서 알아서 멈춰버린다. “좋은 세상이에요.” 상태 모니터를 확인하던 오 기장이 부기장에게 웃으며 말을 한다.
그가 2호기를 다룬지도 12년. 이제는 소리만 들어도 기계의 어디가 잘못 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기계도 사람 따라 간다니까요.” 자리를 비우지 못하고 온종일 돌아가는 기계를 살피는 일과. 인쇄물의 종류에 따라서 농도를 조정하고, 카달로그라도 만들려면 양면의 색이 같아지도록 몇 번이나 돋보기를 든다. 먹색만 들어가는 1도 인쇄물이야 수월하지만, 네 가지 색이 혼합되는 4도 인쇄물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게다가 종이 재질에 따라 인쇄되어 나온 색의 느낌이 다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작업 속도도 천차만별. 그렇게 온종일 우여곡절을 겪다보면, 기계도 다루는 사람 손에 길들여지는 게 당연지사다.
기계가 수월하게 돌아가는가 싶더니, 오 기장이 문득 부기장을 부른다. “뭐가 들어가서 눌린 것 같아요. 먹색이 죽었어요.” 연하게 눌린 자국을 발견한 그가 장갑을 낀다. 뚜껑을 열고 부기장과 함께 롤러 중간에 끼어 있던 고무판을 꺼낸다. “고무가 죽었으니 다시 살려야겠네요.” 꾹꾹 눌려 평평해진 고무판은 다시 먹색 잉크를 잘 머금었다가 종이로 옮겨줄 것이다. 5~6만 장에서 많게는 14만 장까지. 하루 종일 기계를 돌리다보면 이런 일이 빈번하다.
그가 문덕인쇄에서 일한 지는 16년이지만, 인쇄업 자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에 시작했다. 가장 먼저 종이를 옮기고 만지는 작업부터 시작하며 일을 익힌 것이다. 어디 종이 뿐일까? 철판이나 실크 등, 인쇄할 수 있는 건 죄다 해보았다. 심지어 화가의 그림 원본을 인쇄해본 적도 있다.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일을 시작했던 것이 어느덧 지금까지 이어져, 숱한 인쇄물이 그의 손을 거쳐간 것이다. 그가 가르쳤던 후배들이 이젠 다른 인쇄소의 기장으로 어엿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사이, 빠르게 돌아가던 인쇄가 끝났다. 그렇다고 작업이 끝난 것은 아니다. 각 특성에 맞는 후가공을 거쳐서 접지와 제본을 해서 납품까지 완료해야 하는 것이다. 인쇄소의 업무 자체가 분업화되어 있는 터라 어느 한쪽만 잘해서 될 일이 아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동판을 제작해주는 출력실과 그것을 종이로 인쇄하는 기계실의 의견 차이도 때때로 발생하기 일쑤. 그래도 척척 손발을 맞추어나갔으니 45년이라는 시간을 버텨올 수 있었을 터다. 인쇄소가 흔치 않았던 옛날부터 문덕인쇄와 족히 40년을 거래해온 거래처나, 30여 년을 근무한 직원을 봐도 그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인쇄된 종이가 마르는 동안, 오 기장은 동판을 바꾸고 잉크를 닦는다. 종이 냄새 물씬 풍기는 이곳은 오늘도 24시간 불이 밝다.  Ι문덕인쇄 02)462-8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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