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너 어디서 왔니? | 김광원

책 한 권 편집하고 만들어내야 하는 일이 요즘 나에게 주어진 주 업무가 되어 많은 시간 집에 머물고 있는데, 살아오면서 거의 없던 일이 나에게 건너왔다. 그로 인해 집안의 활기가 무척 높아졌다. ‘코코’ 때문이다. 코코는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이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하루 내내 코코와 둘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아내가 진안 어느 지인한테서 분양받아 왔는데, 코코는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고, 온몸은 눈 흰자위만 빼고 온통 까맣다. 아내가 정읍 화해리의 작업실에서 키우려고 데려왔지만, 아직 어린데다가 한겨울 추위 때문에 데려가는 것을 미루고 아파트에서 동거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는 시골집으로 가고, 둘째 아들도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면 난 꼼짝 없이 코코와 함께 긴 시간을 보내야 한다.
가끔 함께 놀아주고 먹이도 주고 하는 건 얼마든지 좋은데, 문제는 배변 문제였다. 동거한 지 보름 정도 지난 요즘에 보면, 코코는 똥은 대체로 베란다에 가서 볼 줄 알아 고마운데, 오줌은 아직도 엉뚱한 곳에 보아 많이 안 놀아주는 주인한테 혼도 나면서 다소 편안하게 커가고 있다. 그러다 혼자 잠들어 있는 코코를 보면 어미 곁을 떠나온 모습에 안쓰럽기도 하고, 아기처럼 귀엽기만 하다. 그런 코코를 마주하며 난 “너, 어디서 왔니?” 하고 속으로 물어본다. 그렇다. 인연이다. 코코와 나 사이엔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인연이 걸리고, 둘 사이에 아니 우리 가족과의 사이에 새 인연의 종자가 날아온 것이다.
학생들과 국어수업을 하다보면 매우 다양한 지문을 만나게 된다. 고등학생이기에 제법 고차원의 내용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수업하면서 나는 내 손을 들고 “이 손이 누구 손이지?” 하며 묻기도 한다. 그러면 당연히 아이들은 “선생님 손이요.” 한다. “정말 이게 내 손일까? 이게 정말 내 손이라면 죽은 뒤에도 내 손이어야 하잖니? 죽은 뒤에 내 것이 아니라면 정말 내 것은 아닌 것이지. 이 손은 대자연으로부터 잠시 빌린 것 아닐까?” 그렇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나는 내 몸을 우주 자연으로부터 잠시 빌려 쓰고 있을 뿐, 인연 작용이 다 끝나고 나면 내 몸은 지수화풍을 따라 흩어져버리고 말 것이다.
아침마다 올리는 심고문의 첫 부분을 나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거룩하신 법신불 사은이시여. 오늘도 사은님의 은혜 속에서 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깨달음의 세계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옵소서. 세계의 전쟁과 무질서와 질병과 가난이 사라지고 이 땅이 진정 평화의 세계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옵소서.” 과연 내가 가고 싶은 깨달음의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오래 전에 난 그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해 주는 책을 만난 적이 있다. 저자(增谷文雄)는 <석존의 직관>이라는 아주 작은 책자를 통해 ‘깨달음의 수동성’을 강조한다. 깨달음은 내 머리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며 찾아가는 게 아니고, 일체의 존재에 대하여 ‘참 그렇구나.’ 하고 절로 알아진다는 것이다. 자신이 선입견을 없애고 마음을 비우면 자연히 찾아오는 게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물이 가득 찬 병에는 공기가 들어올 수가 없다. 물을 비워내면 당연히 그 빈 병은 금세 우주에 만연한 기운으로 가득 채워지는 이치라 하겠다.
요즘 대통령 탄핵 사건에서, 범죄 증거를 없애기 위해 휴대폰 기록을 지웠는데 특검에서는 그 지운 것을 다시 복구하여 범죄 증거를 찾아내고 있다. 흔적을 완전히 지운다는 것도 참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수도인은 지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일 것이다. 물론 그 지우는 일은 참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겠지만, 그게 보통 쉬운 일인가. 참회와 더불어 이루어져야 할 일이 인연 작용에 대한 인식으로 여겨진다. 지금 내 앞에 이루어지는 모든 인연 작용은 영원한 게 아니라는 인식 말이다. 때가 되면 다 사라지기 때문이다.
비우고 바라보면 세상은 훨씬 편하게 보일 것이다. 비눗방울 터지듯이 흔적도 없고 순간순간 이승은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그게 나에게 조금이라도 이루어지면 ‘코코’의 오줌똥을 치우는 내 손도 훨씬 가벼워질 것이고, 매사가 좀 더 여유로울 것이다. 코코는 오늘 새벽 자기 공간 거실에서 주인 방안으로 들어오려 낑낑대지 않았다. 내가 다소 늦잠을 자고 일어났어도 코코는 임시의 제 집인 종이박스 속에서 빠져나와 얌전하게 내 방문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기특하다. 이렇게 인연은 점점 깊어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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