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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대종사(大宗師) 2017년02월호

대종사(大宗師)
- 무위지치(無爲之治)를 실현하는 스승 -
글. 김정탁

사람의 즐거움인 인락(人樂)은 어떻게 해서 생겨날까? 사람과 화합함으로써, 즉 인화(人和)를 통해 형성된다. 장자는 사람과 화합하려면 세상만사를 고르게(均調)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만사를 제물(齊物)의 상태에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제물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장자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내편>에서 ‘제물론’이란 제목의 글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다루는 <외편> 천도(天道)에서 제물에 대한 장자의 생각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장자는 제물을 자연과 화합하는 천화(天和)로 규정한다. 한마디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일이다. 장자에 따르면 자연을 거스르지 않아야 자연의 즐거움인 천락(天樂)을 맛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과 어떻게 화합할 수 있을까? 장자는 이를 위해 천지의 덕(天地之德)에 환히 밝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큰 근본인 대본(大本)이자 큰 근원인 대종(大宗)이다.
장자는 대종이란 개념에서 대종사(大宗師)란 큰 스승을 형상화한다. 나의 큰 스승인 대종사여! 대종사여! 당신은 만물을 산산이 조각내고도 이를 사나움이라 하지 않고, 은덕이 만세에 널리 미쳐도 이를 어짊(仁)이라 하지 않고, 태고(太古)보다 오래 되었어도 이를 오래 사는(壽) 거라 하지 않고, 천지를 감싸 안아 많은 형상을 조각했지만 이를 재주(巧)라 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모두 자연과 화합할 때 가능한 데, 장자는 이를 자연의 즐거움(天樂)이라 말한다.
자연의 즐거움인 천락을 아는 사람은 그의 삶(生)도 자연 그대로 행동하는 데서 나오고, 그의 죽음(死)도 사물의 수많은 변화 중 한 변화일 뿐이다. 또 천락을 아는 사람은 고요할 때는 음기(陰)와 함께 무위자연의 덕(德)을 닦고, 움직일 때는 양기(陽)와 함께 세파에 올라타 덕을 편다. 그래서 하늘에 대한 원망도 없고, 사람에 대한 비난도 없고, 사물에 묶이지도 않고, 귀신을 책망하지도 않는다. 이 모든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이다. 
또 천락을 아는 사람의 움직임(動)은 하늘 같고, 고요함(靜)은 땅 같아서 마음이 한결 같이 안정되어 있다. 이것이 천지(天地)를 바르게 한다. 또 육체의 넋인 백(魄)은 숭상되지 않고, 정신의 넋인 혼(魂)은 피로하지 않아 마음이 한결 같이 안정되어 있다. 이것이 만물(萬物)을 복종시킨다. 또 천락을 아는 사람은 텅 빈 고요함, 즉 허정(虛靜)의 마음으로 천지에 미루어 세상을 이해하고, 또 만물의 이치에 통달해 있다. 그래서 천락을 아는 사람은 성인의 마음을 지닌 채 세상을 먹여 살린다.
성인의 마음을 지닌 채 세상을 먹여 살리는 게 바로 제왕의 덕(帝王之德)이다. 제왕의 덕은 천지를 근본(本)으로 삼고, 도덕을 주인(主)으로 삼고, 무위를 전범(常)으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무위지치(無爲之治), 즉 무위에 따른 다스림이다. 그런데 하고자 함이 없는 무위(無爲)는 천하를 위해 쓰기엔 여유가 있지만 하고자 함이 있는 유위(有爲)는 천하를 위해 쓰기엔 부족하다. 그만큼 무위는 유위에 비해 그 자원이 무궁무진하다. 
옛 사람들은 이 무위를 소중하게 여겼다. 백성은 군주와 덕(德)을 같이하는데 군주가 무위하고 백성도 무위하면 백성은 신하(臣)로 전락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백성이 유위하고 군주도 유위하면 군주는 나라의 주인(主)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군주는 필히 무위로서 천하를 다스리고, 백성은 필히 유위로서 천하를 위해 쓰여야 하는 게 영원히 변치 않는 도(道)이다.  
그래서 옛날 천하의 왕은 천지를 감쌀 지혜가 있어도 스스로 사려하지 않고, 만물을 꾸밀 언변이 있어도 스스로 말하지 않고, 세상일을 맡아 처리할 능력이 있어도 스스로 나서지 않는다. 하늘이 만들지 않아도 만물은 저절로 생겨나듯이, 또 땅이 키우지 않아도 만물은 저절로 자라나듯이 제왕은 무위의 상태에서 천하를 잘 다스린다. 그래서 하늘만큼 믿을만한 게 없고, 땅만큼 넉넉한 게 없고, 제왕만큼 큰 게 없다. 이에 제왕의 덕은 천지와 짝을 이루는데 이것이 천지를 타고 만물을 거느려서 뭇사람들을 쓰는 도이다.
근본(本)은 위에 있고, 말단(末)은 아래에 있으며 큰 강령(要)은 군주에게 있고, 세부적인(詳) 것은 신하에게 있다. 이렇게 보면 큰 군사를 움직이는 건 덕(德)의 낮은 차원이고, 상벌과 이해, 묵형·의형·월형·궁형·대벽 등의 오형(五刑)을 명확히 하는 건 교화(敎)의 낮은 차원이고, 예법과 법도, 형명(形名)을 상세히 따르는 건 다스림(治)의 낮은 차원이고, 종과 북소리, 깃털과 깃대장식의 춤은 즐거움(樂)의 낮은 차원이고, 곡읍과 최질, 죽음을 애도하여 높이는 상복은 슬픔(哀)의 낮은 차원이다. 이 다섯 가지는 인위적인 것으로 정신 작용과 마음의 움직임을 기다린 뒤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이런 낮은 차원의 방법을 배우긴 했어도 이를 앞세우지 않았다.
군주가 앞서면 신하가 따르고, 아버지가 앞서면 자식이 따르고, 형이 앞서면 아우가 따르고, 어른이 앞서면 젊은이가 따르고, 남자가 앞서면 여자가 따르고, 남편이 앞서면 아내가 따른다. 이처럼 앞서고 뒤서는 건 천지의 운행에 의한 것이다. 또 하늘이 높고 땅이 낮은 건 천지신명이 정한 자리이고, 봄여름이 앞서고, 가을겨울이 뒤따르는 건 사철의 순서이고, 만물이 생겨나 싹이 터 자라 서로 다른 형상을 지닌 뒤 성하고 쇠하며 맞이하는 죽음은 변화의 흐름이다. 천지는 지극히 영묘한 존재여서 높고, 낮고, 앞서고, 뒤서는 등의 순서가 있다. 그러니 사람의 도리(人道)에도 당연히 순서가 있다. 예를 들어 종묘에선 친척이, 조정에선 지위 높은 사람이, 향리에선 나이 든 사람이, 일하는 데는 어진 사람이 숭상 받기 마련이다.
도를 언급하며 그 순서를 말하지 않으면 그건 도가 아니다. 그래서 옛날에 큰 도(大道)에 밝은 사람은 먼저 하늘의 도를 밝힌 뒤 도덕(道德)을, 도덕이 밝아진 뒤 인의(仁義)를, 인의가 밝혀진 뒤 역할과 직무인 분수(分守)를, 분수가 밝혀진 뒤 일의 실적과 약속의 일치인 형명(形名)을, 형명이 밝혀진 뒤 능력에 따른 자리의 임명인 인임(因任)을, 인임이 밝혀진 뒤 일의 감찰인 원성(原省)을, 원성이 밝혀진 뒤 시비(是非)를, 시비가 밝혀진 뒤 상벌(賞罰)을 각각 그 다음에 두었다. 그리고 상벌이 밝혀진 뒤에는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이 각자 합당한 평가를 받고, 또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은 각자 신분에 어울리는 자리에 올랐다.
그래서 어진 사람과 못난 사람은 각자 실정에 부합하는 처우를 받고, 반드시 능력에 따라 관직이 나누어지고, 그 관직의 이름에 근거하여 업적을 평가해야 한다. 이럼으로써 군주를 섬기고, 백성을 부양하고, 만물을 다스리고, 몸을 닦아야 지모가 쓸 데 없어져 각자 타고난 자연 상태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를 태평(太平)이라 일컫는다. 이것이 다스림의 극치이다.
이에 옛 글은 말한다. 수행한 실적(形)이 있으면 앞서 행한 약속(名)이 있다. 실적과 약속의 일치는 옛 사람도 지녔지만 그걸 앞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옛날에 큰 도를 말한 사람은 1)큰 도 2)도덕 3)인의 4)분수를 말한 뒤 실적과 약속의 일치인 형명을 말하고 5)형명 6)인임 7)원성 8)시비를 말한 뒤 상벌을 말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형명을 말하면 근본(本)을 모르고, 또 느닷없이 상벌을 말하면 처음(始)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도(道)를 거꾸로 말하고, 도를 어그러지게 말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다스려지기나 했지 남을 다스려 본 일이 없다.
따라서 느닷없이 형명이나 상벌을 말하면 다스림의 도구(具)는 알아도 다스림의 도(道)는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천하에 쓰일 수는 있으나 천하를 다스리기에는 부족하다. 이런 인물을 두고 말 잘하는 선비(辯士)라고 하는데 한 가지 재주만 갖춘 사람이다. 예법, 법도, 형명(形名)을 일일이 따르는 건 옛날 사람에게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는 백성이 군주를 섬기는 것이지 군주가 백성을 부양하는 게 아니다.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