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개벽 주체의 탄생
- 원불교 정화제의로써 기도결사 운동 -

글. 박윤철

정화제의(淨化祭儀, Purification Ritual)라는 것이 있다. 정화제의란 영적 존재 또는 우주의 궁극적 존재에 대한 체험을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성스러운 의식을 말한다. 정화제의란 말 그대로 지난날의 낡은 생각, 낡은 생활, 낡은 습관 등을 말끔히 씻어내어 전혀 차원이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게 한다. 원불교교사(圓佛敎敎史)에서 ‘구인단원의 기도’라고 불리는 1919년의 기도결사(祈禱結社) 운동과 그에 따른 법인성사(法認聖事)는 원불교를 대표하는 정화제의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영적 존재, 즉 우주의 궁극적 존재와 만날 수 있는 종교성(宗敎性)이 갖추어져 있는 바, 그것은 정화제의의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기 4년(1919) 음력 3월 26일, 서울에서 시작된 3.1독립운동이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져가던 그 시기에 소태산 대종사는 구인단원 곧 아홉 제자에게 이렇게 명을 내린다.
현하 물질문명은 금전의 세력을 확창(擴昌)하게 하여주므로 금전의 세력이 이와 같이 날로 융성하여지니 이 세력으로 인하여 개인, 가정, 사회, 국가가 모두 안정을 얻지 못하고 모든 사람의 도탄(塗炭)이 장차 한이 없게 될 지니 단원된 우리로서 어찌 이를 범연히 생각하고 있으리요. (중략) 모든 사람의 정신이 물욕에 끌리지 아니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주기를 기도하여 기어이 천의(天意)의 감동하심이 있게 할 지어다.(불법연구회창건사)
위의 인용문 속에 나오는 ‘물질문명’이란 서구로부터 들어온 근대문명 즉 과학문명을 말하며, ‘금전의 세력’이란 자본주의를 가리킨다. 대종사께서는 서구로부터 일방적으로 유입된 근대문명이 당시의 식민지조선을 유린하고, 자본주의 즉 ‘금전의 세력’이 조선 민중들의 삶을 구렁텅이로 내몰고 있던 ‘도탄’ 현상을 직시하고, 아홉 제자들로 하여금 그 같은 ‘도탄’ 현상을 치유하는 방안으로써 기도결사를 명하셨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당면한 시국에 대한 정확한 판단 아래, 그 시국이 안고 있는 근본적 문제해결의 길을 기도결사 운동에서 찾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원불교의 기도는 그 출발부터 이미 사회, 곧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공공성(公共性)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종사께서 교화(敎化)를 시작한 지 불과 5년도 채 되지 않던 시기에 어떻게 이렇게 강력한 공공성을 띤 기도를 행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대종사께서 1916년 4월 대각 직후, 방편교화를 펼치던 시기에 모여든 민중들은  그 심중에 원하는 바는 무릇 이해하기 어려운 비결이며 난측한 신통 묘술이며 수고 없이 속히 되는 것 등이요, 진리의 묘체(妙體)와 인도의 정의를 분석하는 공부는 원하지 아니하며 설령 그 정법(正法)을 설하신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재미있는 이해를 가지기가 어렵게 되었다. (불법연구회창건사)
고 할 정도로 ‘허위 미신에만 정신이 돌아가고’ ‘가위 부평초 같은 신(信)’을 지닌 오합지중(烏合之衆)이었다. 그런데 그 같은 오합지중에게 어떻게 이렇게 세상을 위한 기도에 나서는 ‘커다란 차원변화’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일까. 제자들이 차원변화를 할 수 있었던 데는 당연히 대종사의 적절한 지도가 따랐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대종사는 대각 직후 모여든 신종자에 대해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방편교화’를 펼침으로써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다음으로 저축조합운동과 방언공사(=간척지개척)를 통해 그들이 원하는 복(福)을 진리적이며 사실적으로 구할 수 있는 길을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제자들 뿐만 아니라 주변 민초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획득할 수 있었다. 특히, 무산(無産)의 처지에 있던 제자들이 대종사를 중심으로 결속하여 3만여 평의 간척지 개척에 성공한 것은 아홉 제자의 삶에 결정적인 차원변화를 일으킨 일대 사건이었다고 보인다. 요컨대, 방언공사 착수 과정에서 제자들은
마음은 한 사문(師門)에 바치고 몸을 공중사(公衆事)에 다하여 영원한 일생을 이에 결정하옵고, 먼저 방언공사를 착수하오니 오직 여덟 몸이 한 몸이 되고 여덟 마음이 한 마음이 되어 영역고락(榮辱苦樂)에 진퇴를 같이 하며, 비록 천신만고(千辛萬苦)와 함지사지(陷地死地)를 당할지라도 조금도 퇴전치 아니하고 후회치 아니하고 원망치 아니하여 종신토록 그 일심을 변하지 않기로써 서약 (불법연구회창건사)
할 정도로 이미 강한 결속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결속력이 방언공사 성공 후에는 더욱 더 배가(倍加)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대종사에 대한 믿음, 대종사의 탁월한 지도력에 대한 제자들의 확신은 부동(不動)의 것이 되었으며, 다시 그 부동의 믿음은 마침내 사람의 생사라 하는 것은 누구나 물론하고 조만간 다 있는 것이로되 시방세계(十方世界)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천만 인 중 가장 있기 어려운 바이며, (중략) 저희 등이 심증에 시방세계를 일가로 보는 넓은 생각을 얻게 되었으니 그 사상 발전에 어찌 큰 영광이 아니며, 또는 저희 등의 희생한 공덕으로 만약 시방세계 중생이 영원한 행복을 받게 된다면 저희 등에 있어서는 얼마나 큰 사업이 되겠습니까. (불법연구회창건사)라고 하는 생사(生死)를 초월하는 일대 기도운동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1919년에 대종사의 아홉 제자가 행한 기도결사운동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바로 아홉 제자들의 삶에 기적처럼 찾아온 차원변화의 극치 그 자체였다. 이른바, 오합지중의 이름 없는 민초에 지나지 않았던 이들이 시방세계를 위하여, 물질문명 곧 서구 근대문명의 일방적 유입으로 인해 유린당하는 민중들을 도탄으로부터 건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하겠다는 각오를 보여줌으로써 천의(天意)마저 감동시킨 원불교 정화제의의 꽃이었다. 일찍이 덴마크 출신의 실존철학자 케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기도는 하느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대종사의 아홉 제자들은 기도결사운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셨음에 틀림없다.“내 몸은 이제 시방세계에 바친 몸이다.”라는 차원변화를 온몸으로 실감하셨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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