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제비갈매기의 꿈


“모든 것은 꿈에서 시작된다. 꿈 없이 가능한 일은 없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공화제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는 등 평생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소설가 앙드레 말로의 말이다.
오늘 내가 ‘꿈’ 얘기를 하는 것은 ‘꿈의 실현’이라는 말보다 ‘그 꿈을 닮아간다.’라는 말이 가져오는 감동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꿈의 실현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 꼭 눈앞에 활짝 펼쳐져야 인생은 아름다운 건가? 그 꿈의 실현이 아니라도 세상은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 나 자신이 그 꿈에 한 발씩 한 발씩 가까워질 수 있다면 인생은 참 빛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새해 첫날이 되면 각자 나름대로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된다. 아무리 미약하다 해도 “올 한 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어 하지?” 하면서 그 꿈틀거리는 느낌을 누구라도 갖게 될 것이다. 오늘도 난 붉은 해를 바라보며 새 아침을 맞이한다. 갑자기 ‘북극제비갈매기’가 떠오른다. 언젠가 신문을 보며 ‘북극제비갈매기’의 생태에 감탄했었다. 북극제비갈매기는 몸길이는 35cm 정도, 날개를 펼쳤을 때의 폭은 80cm 정도이고, 몸무게는 125g밖에 되지 않는다.
이 새는 북극과 남극을 오가며 지구상에서 가장 먼 거리를 옮겨 다닌다. 북극의 여름인 4~8월에 걸쳐 북극에서 번식하고, 새끼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남극으로 이주해서 여름을 보낸다. 이듬해 남극의 겨울이 시작되는 4월이면 번식을 위해 자기가 태어난 북극으로 돌아간다. 이들의 연간 이동거리는 무려 7만9백km에 이른다. 단순히 먼 거리를 이동해서가 아니라, 남극과 북극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게다가 먼 거리를 편서풍을 이용하여 이동할 줄 아는 그들의 지혜는 실로 감탄스럽지 않은가.
그들 어미의 육아법은 자못 혹독하다. 잡아온 물고기를 이리저리 던져가면서 훈련시킨다. 날지도 못하는 새끼가 작은 다리를 뒤뚱거리며 겨우 먹이에 다가서고, 먹으려는 순간 어미는 먹이를 먼 곳으로 던져 버린다. 새끼는 다시 힘겹게 바닷가 언덕을 오르내려야 한다. 그런 훈련의 과정이 있기에 북극과 남극을 오갈 만한 오기가 길러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하늘을 난다. 편서풍을 이용하여 지구에 S자의 선형을 그려가며 지혜롭게 날아간다. 생명의 개체 밀도가 낮은 순백의 남극, 북극 땅에서 자유를 누린다. 삶은 축복이어도 그 삶의 조건은 언제라도 혹독할 수 있다. 잠시 나에게 평화로운 세상이 찾아온 듯해도 언뜻 방심한 사이에 그 평화로움은 금세 깨지고 해체되고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우리 대한민국의 지금 현실이 그런 풍경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미국의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이 생각난다. 어머니로부터 ‘큰 바위 얼굴’ 전설을 들은 주인공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을 상상하며 겸손하고 성실하게 살아간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아가는 매우 평범한 시골사람이었지만, 그는 설교가가 되었고 어느 날 ‘큰 바위 얼굴’로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주인공 어니스트는 자만하지 않고 자기보다 현명하고 기품 있는 인물이 나타나기를 소망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큰 바위 얼굴’을 그리워하다 그는 스스로 ‘큰 바위 얼굴’을 닮아간 것이다.
여름밤이면 우리 주변에서 ‘달맞이꽃’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어느 날 나는 뒷산에 올라 노란 달맞이꽃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진하면서도 은은한 향기와 함께 시의 첫 마디가 솟아나왔다. “오늘 나는 보았네. 달도 없는 밤에 달빛을 보았네.” 얼마나 달을 그리워했으면 마침내 이 꽃은 달을 품고 달빛 향기를 흘려내고 있을까. 얼마나 ‘민주화’를 꿈꾸었기에 죽었던 그들은 달빛을 품고 우리들 앞에 다시 어른어른 나타나게 되는 걸까.
“정말로 그리운 것은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네. 그래도 그리우면 스스로가 그리움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도 이제야 떠올랐네. 만나지 않아도 아름답다는 것을 새로 알았네. …… 바람이 되어 흘러가 버린 그대를 품고 있으면 누구도 몰래 사르르 달빛이 흐른다네. 혼자서 그리운 산 위에서 달도 없이 피어나는 꽃을 보았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꿈을 이룬다는 말보다 꿈을 닮아간다는 말이 훨씬 더 감동스럽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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