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 행복도 덧없다

탐욕스런 자는 재물에, 허세한 자는 권세에 목숨 잃어

한 해가 또 간다. 이제 병신년 달력도 마지막 한 장 남았다.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면서 정리할 때다. 사회는 혼란스러워도 개인은 차분히 자신을 돌이켜보자.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 나는 과연 행복했는지 등에 대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행복은 덧없는 것’이란 사실은 공통적이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만 봐도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란 말이 딱 떨어진다. 덧없을 뿐만 아니라 딱하고 안쓰럽기까지 하다.
서양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B.C 4세기에 쓴 최초의 역사책 <역사>에는 역사가 아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의 무대는 소아시아의 리디아왕국. 그리스 정치인이자 철학자 솔론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를 방문하자, 왕은 신하를 시켜 솔론에게 금은보화가 가득한 보물창고를 보여준다. 그리곤 잔치를 베풀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솔론은 왕의 예상과 달리 “아테네의 텔로스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왕은 그 이유를 물었다.
“텔로스는 번성하는 도시에 살며 훌륭하고 탁월한 두 아들을 두었는데, 살림이 넉넉할 때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그는 아테네인들이 엘레우시스에서 이웃 나라들과 싸울 때 전투에 참가해 적군을 무찌르고 더없이 아름답게 죽었다. 아테네인들은 그가 전사한 곳에 나랏돈으로 매장해주고 그의 명예를 드높였다.”
그러자 왕은 자신이 적어도 두 번째 행복한 사람은 될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그 다음으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솔론은 이번에도 왕의 예상을 벗어나 “아르고스의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라고 대답하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아르고스에서 태어난 형제는 살림도 넉넉하고 체력도 뛰어났다. 헤라축제가 열렸을 때 이들 형제의 어머니는 들판에 나가 있던 소들이 제때에 돌아오지 않아 신전으로 갈 수 없는 위기에 봉착했다. 시간이 촉박하자 두 젊은이가 직접 멍에를 쓰고 어머니가 타고 있는 달구지를 끌었다. 45스타디온을 달려 신전에 겨우 도착한 그들은 일을 완수한 다음 가장 훌륭한 죽음을 맞았다. 신은 그들의 죽음을 통해 ‘인간에게는 삶보다는 죽음이 더 좋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고 격찬했다. 아르고스인들은 그들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장부(丈夫)라고 칭송하면서 그들의 입상을 델포이에 봉헌했다.”
왕은 자신이 행복한 사람의 축에 끼지 못하자 화를 버럭 내며 “자신의 행복이 그런 무명 시민들보다 못하냐!”고 했다.
“전하께서는 거부(巨富)에다가 수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있는 왕이옵니다. 하지만 저는 전하께서 행복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물음에 답할 수가 없사옵니다. 큰 부자라도 제가 가진 부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즐기지 못한다면, 그날 그날을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할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전하! 무슨 일이든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신께서 행복의 그림자를 언뜻 보여주시다가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뜨리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까요.”
왕은 자신의 현재 부귀영화를 보고도 결말을 봐야 행복한지 알 수 있다는 솔론을 어리석은 자라고 치부하고 냉담하게 돌려보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은 페르시아 왕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체포되어 화형당할 위기에 처했다. 화장단에 불이 타오르는 순간 크로이소스는 그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솔론의 이름을 세 번 불렀다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인간의 행복은 덧없다는 사실에 대해 ‘도시의 흥망성쇠에 비춰 전에는 강력했던 도시가 미약해지고, 지금 강력한 도시는 전에는 미약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도시 뿐만 아니라 인간 역시 순환하고 덧없는 존재이니 현재의 행복에 자만하지 말고 항상 겸손하라고 충고한다.
동양 최고의 고전 사마천의 <사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열전의 마지막 ‘태사공자서’에 백이를 머리로 택하면서 ‘말세에는 모두가 이익을 다투지만 오직 백이와 숙제만은 의(義)를 좇았다. 나라를 양보하고 굶어 죽으니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칭송했다.’며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누구라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지저분한 삶을 접고 깔끔한 죽음을 택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사마천은 의문을 제기한다. “하늘의 도는 치우침이 없고, 늘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는데 과연 그런가?”라고. 덕을 쌓고 착하게 행동하며 의리를 지킨 백이는 굶어 죽었다. 반면 날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포악한 행패를 저지른 도척은 평생 놀면서 쾌락 속에 살았다. 요즘 어이없는 국정농간을 부린 최순실과 그 일당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니 과연 하늘의 도, 즉 천도(天道)가 정말 있기는 한가.
이에 대해 사마천은 ‘천도무친(天道無親: 하늘의 도는 치우침이 없다.)’이란 화두를 꺼낸다.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도 그 연장선이다. 천지는 어질지 않고, 만물의 생장성쇠를 자연스럽게 둔다. 성인도 어질지 않으며, 백성 스스로 조화롭게 살도록 둔다는 것이다. 이는 도교의 가르침인 무위자연과 맥을 같이 한다.  
탐욕스런 자는 재물에, 열사는 이름에, 허세한 자는 권세에 목숨을 잃는다. 어떤 행복을 선택할 것인가. 물론 선택한다고 다 이뤄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시점에서 한번 곰곰이 되새겨봐야 할 것 같다. 동서고금의 역사가 주는 교훈은 ‘인생도 행복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역사가 곧 종교와도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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