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의 역사와 원불교

글. 이정재

최치원의 <난랑비서>는 삼교융합론을 논할 때 반드시 언급이 되는 자료다.
관건은 풍류에 대한 부분이다. 유·불·도와 이 풍류가 어떤 선후의 관계가 있으며 내용적 상관 정도가 어떠한가, 또 화랑과 이들 양자간에는 어떤 역사적 사상적 연관성이 있는가의 논의가 주요 쟁점이다. 우선 난랑비서의 요지는 이렇다. 이미 한반도에는 풍류도가 있었고, 그 전통이 역사에 기록된바, 신라의 주요 사제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유·불·도 삼교의 사상이 모두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불·선의 모든 교의가 풍류도에 들어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원불교의 경우 이 풍류를 가벼이 할 수 없는 곡절이 있다. <정산종사법어> 유촉편에 이런 글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하시기를 내 어려서 천어처럼 생각되기를 “풍류(風流)로서 세상을 건지리라.” 하였더니 옛 성인도 “풍기(風紀)를 바루고 시속(時俗)을 바꾸는 데에는 풍류 같음이 없다.” 하셨나니라.’(<정산종사법어> 제15 유촉편 17장)
최치원과는 천 년 이상의 거리를 두고 나온 ‘풍류’예찬론의 곡절은 무엇인지, 또 같고 다른 점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원불교대사전>에서는 풍류도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 풍류를 닦던 신라의 청소년 심신수련 조직. 화랑도(花郞徒)·낭가(郞家)·국선도(國仙徒)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진흥왕대에 왕과 귀족의 자제로 조직된 이후 국가의 문·무(文武) 인재를 이에서 취했다. 그 기원은 민족 고유사상으로 불교·유교·도교 등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유습은 고려 이후에도 이어져 문화·예술 및 풍속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2) 세속의 욕심 경계를 벗어나 가무(歌舞)를 즐기는 길. (풍류도[風流道] (원불교대사전,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정산 종사가 이 풍류라는 용어를 언급하는 바람에 원불교교학은 이에 대한 관심이 이어졌고 원불교 관련 배경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원불교학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유병덕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한 논지를 정리한 바 있다. 그 내용을 먼저 살펴본다.
한민족에게는 원래부터 풍류문화가 있어왔다. 이 풍류는 한민족의 전 역사과정에 걸쳐 부침을 거듭하였지만 오늘까지 맥맥히 이어져왔다고 한다. 고조선대에 유구히 흘러오던 홍익인간을 위시한 한밝사상이 있었다. 이것은 원래 선교(仙敎)적인 것이었는데, 고조선이 확장하면서 외부로부터 들어온 무속(巫俗)이 접목되어 선·무적 조화의 풍류문화가 꽃을 피웠다. 즉 상층과 하층이 각각 선(仙)과 무(巫)에 중심을 두고 조화로운 풍류문화를 이어왔다. 즉 원래의 풍류문화는 선과 무의 결합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찬란했던 풍류사상은 4000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또 다른 왜래 종교와 만나는 과정에서 때론 흥하고 때론 쇠하면서 조선 후대에까지 이르다가 구한말을 당해서는 신종교의 형식으로 부활하게 된다. 그런데 이 선적인 것과 무적인 것의 역학관계에 따라 흥망이 정해졌다. 삼국과 통일신라 및 고려의 중흥까지 흥했다가 조선대에는 이 둘의 전통을 아예 단절시킨 역사과정을 밟아왔기에 한일합방이라는 단군 이래 초유의 재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핵심은 선주무종(仙主巫從)의 풍류문화 전승 여부가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한 글이다. 즉 이 글은 정산의 풍류사상이 유구한 역사적 유래를 가진 것이고, 근세에 일어난 신종교 이해의 주요 논점이 된다는 데에 집중한 것이다.
한밝사상은 풍류문화로 정착되어 고조선의 번영을 꾀하였다. 그 전통을 온전히 계승하여 성공적으로 실현한 국가는 신라였다. 최치원이 밝혔듯이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라 한다.”라고 한 바와 같다. 삼국통일의 위업도 화랑도의 활약과 분리할 수 없는데, 이들 화랑정신의 핵심에 풍류도가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 신라가 반도의 외진 변방에 있으면서 승리자가 될 수 있었던 바는 한밝사상에 근거한 풍류정신을 온전히 계승했기 때문이라고 유병덕은 적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변수는 불교와의 관계다.
“신라는 한밝사상의 지속으로 인해 지역의 취약성을 극복하고 도리어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신라인들은 이 한밝사상을 풍류도(風流徒), 풍월도(風月道)라 이르고 불교의 미륵사상을 받아서 화랑집단을 형성하였다.”(유병덕, <풍류도와 미륵사상>, 234쪽)
고구려와 백제가 삼국경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불교를 수용하되 신라처럼 주체적으로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신라는 고래의 풍류정신을 계승하면서 불교를 접목하여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는 한밝사상의 두 축인 선과 무의 경향 중에 무교적인 것이 승하여 균형과 조화를 잃고 몰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자 주체적 자각이 둔화되고 한밝의 이념 즉 선적정신은 현실쾌락주의로 전락되고 … 민간의 무적 신명이 이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후삼국의 격변을 마무리한 왕건의 건국이념에는 ‘한밝사상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했고, 이에 대한 예로 연등회와 팔관회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고려대까지 이어오던 풍류정신은 조선대에 이르러 큰 단절을 경험한다. 불교를 버리고 성리학을 택해 유리적(唯理的) 공리공론의 관념론에 빠졌고, 결국 왕권과 사대부 간의 이권차지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불행이 지속되었다. 또한 민족의 정기였던 한밝사상은 짓밟히게 되었다고 했다. 결국 조선은 단군 이래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던 국권박탈이라는 비극을 초래한다.
이런 기득권자들의 행태와 달리 재야의 지각있는 현자들은 나름의 궁여지책을 마련하게 되었고, 소위 도교와는 다른 선교라는 맥을 이어갔다. 그 가시적 결과는 홍암에 의해 창시한 대종교의 삼일(三一)철학이다. 조선 중엽에 형성된 단학(丹學)과 국선도(國仙徒)도 같은 한밝사상의 움직임이었다. 이에 임진왜란, 병자호란, 병인양요 등의 외환과 함께 조선 중기 왕조몰락의 유언비어를 생산한 격암유록이나 토정비결, 정감록 같은 예언비서들이 등장하게 된다. 유병덕에 따르면 이 시기 한밝사상의 전통을 다시 세울 수 있던 기회는 실학의 등장으로 가능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역시 편협된 성리학의 배타성으로 실현되지 못하게 되자 한밝사상은 민중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시도되기 시작한다. 최수운, 강증산, 소태산으로 이어지는 신종교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대에 단절된 불교 특히 미륵사상이 이 신종교의 단계에 와서 비로소 재결합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 유병덕 교수의 논지다. 즉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오던 풍류의 한밝사상은 조선이 망하고 나서야 재등장하는데, 성리학의 몰락은 동시에 미륵사상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밝사상과 미륵사상과의 새로운 조우가 일궈낸 것이 신종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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