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은 무겁다

삼국시대의 DMZ, 호로고루에서

 글. 노태형 편집인

옛 성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흔적마저 희미해져 홀로된 성이죠. 사람들은 천 년 넘게 그곳에 집을 짓고 밭을 일구며 살았을 것입니다. 고구려의 잊혀진 옛 성, 호로고루에서 말이죠.
가끔, 그곳을 찾습니다.
생각을 정리해야 하거나, 위로가 필요할 때죠.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라도 결국 홀로 치유해야 하는 것이 우리 삶, 아니던가요? 세상 살면서 어찌 상처 없는 사람 있겠습니까. 가장 좋은 위로는 ‘자연’이라고 하죠. 아마 제 마음 속에도 어쩔 수 없는 상처가 생겼나봅니다.



그곳에 서면 강물 소리마저 고요합니다.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멈춘 곳에는 돌돌돌 여울물 소리가 대신 채워지고, 내내 귓가를 흔들던 사람들의 아우성은 바람과 새소리가 말끔히 씻어냈습니다. 너무 깊은 강물은 소리마저 삼켜버리기에 무겁고 두렵죠. 그래서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여울로 모이나봅니다. 허튼 소리를 맘껏 내질러도 가만히 들어줄 여울물 같은 사람, 말이죠.
호로고루는 기껏해야 300여 평. 성은 삼각형 모양으로 강가에 섰습니다.
이곳은 배를 타지 않고도 넓은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 서울에서 개성과 평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목이었다죠. 고구려는 이곳에 신라군의 북진을 막는 국경방어사령부를 주둔시켰습니다. 어느새 1500년 전의 이야기가 되었네요.
지금의 호로고루도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강물이 흐르는 남쪽 절벽 아래는 여전히 얕은 여울이 반짝이지만, 강 건너는 어느 때부턴가 일반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된 군사지역으로 남았죠. 또 북쪽 절벽 건너 산 하나만 넘으면 그 무시무시한 비무장지대가 놓여있습니다. 호로고루는 예나 지금이나 참 비운의 땅인가 봅니다.



비운은 하나 더 있습니다.
호로고루에서 1㎞ 가량의 북쪽, 군사분계선 바로 아래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무덤이 오랜 세월 머물러 있습니다.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그는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고 개경, 지금의 개성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죠. 경순왕의 운구행렬이 이곳 임진강 고랑포에 이르렀을 때, 고려 왕실에서는 경주지역의 민심을 우려해 ‘개경 100리 밖에 왕릉을 쓸 수 없다.’며 운구행렬을 막았다는군요. 그래서 경순왕의 능은 신라왕릉 가운데 경주 지역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오랜 세월.
어쩜 인생사란 게 좋은 일이든 싫은 일이든 무거운 짐일 수 있고, 마음 쓸 일이 많을수록 복잡하지 않겠어요. 옛 사람들은 그래서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라고 한 모양입니다. 가끔은 행복마저도 무거운 짐이 됩니다.
연천군 임진강 강가에 숨겨진 호로고루는 이제 누군가의 마음을 지켜주는 비밀요새가 되었습니다. 찾는 이 없으니 그곳을 즐겨 찾는 이도 생긴 겁니다.
그러니, 자기만의 숨겨진 땅에서 그 무거운 짐 툭 내려놓고 오게요.
또 한 해가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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