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교합일의 역사와 풍류

글. 이정재

근현대에 새로 등장하는 세계적 신종교의 추세는 주로 통합주의적 종교관을 특징으로 한다. 한국에서 출현한 신종교는 유·불·선 삼교의 융합 양상이 특징이다.
삼교일치, 삼교합일, 삼교론, 삼교평심(平心)론, 삼교회통, 삼교일리(一理)론, 삼교통합론, 삼교융합론 등은 기존의 연구과정에 등장하는 유·불·선 삼교의 상관성을 논하는 다양한 용어들이다. 이들은 나름의 역사적 배경에 근거한 사상사적 개념들이다. 그 출발은 멀리 위·진 남북조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등장하는 삼교일치의 개념은 BC 2~3세기 한(漢)대 무렵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비롯된다. 유교와 도교가 중심 사상으로 굳힌 자리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주객 간의 불화가 시작된 것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 하니 그 반작용에서 유래된 것이 삼교합일론이다. 당시까진 소박하기만 했던 유교와 특히 도교에게 교리적 체계나 사상적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등장한 불교는 존립을 위협하는 상대로 인식되어, 텃세를 부리며 불교를 공격하고 흠집 내기에 들어간다.
이러한 저항에 불교는 포용적인 자세를 취하며 삼교는 본래 같은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진리적 사상에 근거한 통합이 아니라 조직의 정치적 처지에 기반한 처사였던 것이다. 서로 싸우지 말고 잘 지내자는 유화책으로서의 삼교일치론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유·도는 배불론의 입장을 내세워 대응한다.
소박했던 텃세부리기 단계를 견딘 불교는 당(唐)대에 들어서 전성기를 맞이하고, 전세를 역전시키는 단계에 돌입한다. 유·도의 텃세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불교는 중국의 한족 엘리트층들에 깊숙이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결국 박힌 돌을 흔드는 지경에 이른다. 전성기라고는 하지만 유·불·도는 여전히 서로 견제를 지속했고, 이번에는 열세에 몰린 유·도 쪽에서 삼교일치론을 내세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은 근본적으로 불교와의 다른 점을 지적하며 공생의 의지를 드러냈다. 이런 경향은 배불론과 호법론이라는 길고 긴 갈등과 경쟁의 여정을 이어가다가 송(宋)으로 이어진다(강여구).
북송에서 논의된 삼교론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회통론으로 전개된다(김경수). 김경수는 10~11세기에 활약했던 불교의 연수와 계승, 도교의 진단과 장백단, 유교의 주렴계, 정이천 등을 들어 그 치밀했던 사상적 격돌을 소개하며 수도론, 수련론, 수양론에 따른 삼교회통의 수준 높은 논쟁을 제시하고 있다. 송대 이후 유·불·도의 철학적 깊이가 순숙되어 있음을 실감케 한다. 이후 등장하는 성리학이나 양명학이 모두 이 시기에 논의된 사상에서 유래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임형석). 삼교 간 자리싸움의 결과가 오히려 상호 호혜적 결과를 낳게 된 셈이다. 그러나 이들 간의 경쟁과 질타는 지속되었다.
이미 지난 호에서도 살폈던 바, 칭기스칸과 쿠빌라이가 남송 정복의 전후에 벌어진 수차에 걸친 크고 작은 도·불논쟁은 오히려 그 정도가 더욱 심화된 느낌마저 들 정도다. 도교의 수장 장춘진인이 칭기스칸을 만나면서 도교의 발전은 크게 약진을 하였는데, 그 중심 논지가 긴 숙성과정을 거쳐왔던 삼교합일론이었던 것이다. 세계제국을 건설한 칭기스칸에게 종교의 ‘차등’이 아닌 ‘회통’의 사상은 정책적으로도 구미가 당겨지는 부분이다. 둘은 인간적 교유를 진하게 남겼는데, 필자는 이를 그들 간 사상적 원융함의 소통결과였다고 평가하였다. 필자가 논하려 했던 옥추경의 등장은 이 시기에 이루어지는데, 바로 이런 시대적 분위기의 결과가 반영된 도교적 혹은 무속적 회통의 결과물이었음을 앞서 살핀 바 있었다.
이렇게 보면 삼교론 논쟁은 천년에 걸쳐 송대까지 이르면서 사상적 깊이를 더해가다가 더 이상의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해체되었던 것은 아닐까. 논쟁은 다시 천년이 지난 시점에서 무대를 바꿔 한반도의 신종교에서 재현된다. 그렇다면 이 한반도의 삼교론은 19세기 후반에 갑자기 등장했던 것일까?
한국의 경우 삼교론은 원효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구체적인 자료를 남긴 것은 9세기 중후반 고운 최치원에 이르러서다. 그러니 시기적으로 보면 지금까지 한반도에서의 삼교론 논쟁은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논쟁자도 단순치 않다. 고려대의 이규보, 원천석, 이색, 이제현을 비롯한 신흥사대부들의 고민과 그 결과 유교를 택했던 조선대에 수많은 승려들에 의해 시도된 유교와의 유화책으로 삼교론이 끈질기게 이어졌던 바, 그 일단이 이른바 민간도교라 일컬어지는 경향이었다(도현철, 박해당, 최영성).
도교가 누락된 한반도에서는 대체로 무속이 민간도교 혹은 선교(仙敎) 등의 이름으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중국의 삼교론 논쟁과는 그 정도가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삼교론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도교가 빠진 상황에서는 중국과 같은 상호 공존 모색의 양상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실제로 한반도는 불교와 유교의 험한 격전지가 되고 말았다. 도교를 대체한 무속은 조직이 없어 힘을 쓰지 못했고 그저 명맥만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불교가 일제의 힘을 입어 득세를 할 당시 숨을 죽였던 무속은 근세에 삼교융합의 중심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최치원이 유학길에서 접했던 사상은 유학만이 아니었다. 당(唐)대에 이미 만연했던 삼교일치론에 대한 지식을 접했던 최치원이나 당시의 신라 육두품 유학자들에게 삼교론은 이색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삼교 상관성은 송대에 이루어진 치밀한 사상적 논의과정 이전의 거친 일치론을 벗어나지 못했던 듯하다. 그러나 불교관, 유교관 및 도교관을 망라하여 연구한 후 최치원의 삼교론을 논한 이재운의 연구를 보면, 그 사상적 심오함이 어설픈 것만은 아님이 가늠된다.
통일신라가 망해가던 시기에 당시 최고의 지성이었던 최치원이 나라를 구하지 못했다는 혹평이 없지 않으나, 그가 내세운 삼교융합론은 바로 나라를 구하려했던 고민의 족적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이재운). 최치원이 왜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걱정하지 않았겠냐마는, 결국 재야에 몸을 숨겨 사라진 데에는 말함이 없는 가운데 뜻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이재원에 따르면 최치원이 주창한 삼교융합론은, 당시 분열되고 무질서한 사회상의 결속을 위해 내린 정치적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이 순전히 정치적 행보였다는 점이 종교사상사적 관점에서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대목이긴 하나, 사상이라는 것이 사회변화와 전혀 무관치 않다는 점이 사실일진대 일견 일리가 있는 주장이리라. 그러나 그의 삼교융합론은 이런 입장 이외의 논란을 야기하는 부분이 있어 문제가 된다. 풍류와 삼교와의 상관성을 언급한 부분이 그렇다. 그리고 풍류는 정산 종사의 법문에도 명시되어있는 바 삼교론과 함께 가벼이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라 한다. 가르침을 세운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있거니와 내용은 곧 삼교를 본디부터 포함한 것으로서, 많은 사람을 접촉하여 교화한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아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주지와 같고, 인위가 없는 일에 처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해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와 같으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와 같다.”(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난랑비서)  Ι교수·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장. hog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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