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뜸의 덕을 지닌 사람(王德之人)
- 인위(人爲)를 버리고 무위(無爲)를 수행하는 사람 -

글. 김정탁

지난 달 글에서 으뜸의 덕을 지닌 성인, 즉 ‘왕덕지인(王德之人)은 그윽한 덕(玄德)을 지니고서 자연의 큰 질서(大順)를 좇는 사람’으로 언급한 바 있다. 또 유가(儒家)에서 최고의 성인으로 받드는 요·순(堯·舜)조차 으뜸의 덕을 지니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왜 그런지에 대한 이유도 밝힌 바 있다. 물론 요·순 두 임금은 으뜸의 덕은 아닐지라도 다른 사람에 비해 덕이 충만한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장자의 기준에서 볼 때 단지 2% 부족할 뿐이다. 이제부터 장자는 으뜸의 덕에서 볼 때 많이 부족한 사람의 예를 들어, 으뜸의 덕을 지닌 사람이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접근한다. 
첫 번째로 예를 든 사람은 변자(辯者)이다. 변자는 말(言)로서 사리분별이 밝은 사람이다. 동아시아판 소피스트라 말할 수 있다. 이들은 ‘단단한 흰 돌에서 단단하다(堅)와 희다는(白) 걸 분리해야, 처마 끝에 매달아 보여주듯 사물의 의미가 분명해진다.’는 식으로 논리적 완벽성을 추구한다. 이것이 유명한 견백론(堅白論)이다. 견백론의 경우에서처럼, 변자는 사물의 내면보다 외면만 보고 판단하며 말에 능통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성인에 해당하는지 공자가 노자에게 물었다. 노자는 이런 변자를 가리켜 재치만 앞세우거나 재주에 얽매여 몸을 수고롭게 하면서 마음을 번거롭게 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이런 사람은 살쾡이를 잡는 사냥개나 날랜 원숭이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사냥개는 묶여 있고, 날랜 원숭이는 자신이 숨기 좋은 산림에서 잡혀 온다.   
노자가 볼 땐 머리와 발이 있어 사람의 형체를 지니더라도 마음작용을 멈추고, 감각작용을 그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마음작용과 감각작용이 없는 단계에 이르려면 엄청난 내공이 필요하다. 불가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가 이 단계이다. 그렇지만 형체를 지니더라도 도(道)와 함께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살아가며 겪는 갖가지 움직임과 멈춤, 죽음과 태어남, 무너짐과 일어남은 형체가 있는 사람의 의지가 작용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도를 다스리는 건 사람의 몫이다. 그러기에 사람이 사물을 잊고 하늘을 잊는 건 곧 자신을 잊는 일이다. 그런데 자신을 잊은 사람만이 자연스런 하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덕이 으뜸인 성인이란 바로 이런 사람이다.
두 번째로 예를 든 사람은 자기주장만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사람이다. 장자는 이런 사람의 예로 ‘장려면(蔣閭)’이란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킨다. 춘추시대 노(魯)나라 군주가 장려면에게 군주의 도리에 대해 말해달라고 요청하자 처음에는 몇 번 거절했지만 이내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군주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그 가르침의 내용은 공손함과 검소함을 반드시 지키고, 공정하게 충성스런 무리를 발탁하고, 바르지 않은 사심을 지니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어떤 백성이나 군주를 순순히 따를 것이라 전망했다. 또 다른 가상의 인물인 계철(季徹)은 이러한 장려면의 가르침을 두고 사마귀가 팔뚝을 높이 쳐들고서 수레와 맞서는 무모한 짓에 비유했다.
계철에 따르면, 천하를 잘 다스리려면 자연스러워야지 인위적이어선 안 된다. 그래서 큰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면 백성의 마음을 자유로이 풀어주어 저절로 교화를 이루고 풍속을 고치려고 한다. 그러면 백성은 자발적으로 나쁜 마음을 없애면서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도(道)를 천하에 구현하기 위해 자신들의 뜻을 밀어붙인다. 이런 행동들은 타고난 본성(性) 그대로 이루어지기에 백성은 왜 그런 지의 이유조차 알지 못한다. 한마디로 자연스러운 다스림(治)이다. 그러니 요·순이 행했던 백성에 대한 교화만을 숭상하고, 원래의 자연스런 상태(溟然)에 따른 백성에 대한 교화를 낮추어서 평가할 수 없다. 큰 성인에겐 오로지 덕(德)과 하나 되려는 마음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덕이 으뜸인 사람의 모습이다.
세 번째로 예를 든 사람은 기심(機心)이 있는 사람이다. 기심이란, 일을 할 때 기계에 의존하는 마음이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도 기심을 지닌 사람 중 하나이다. 자공이 남쪽으로 가서 초(楚)나라를 유람하고 진(晉)나라로 돌아오면서 한수(漢水) 남쪽을 지나다가 밭을 매던 한 노인을 발견했다. 그 노인은 구덩이를 판 뒤 샘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항아리에 물을 담아 나와선 일일이 밭에 물을 주었다. 자공은 그 노인에게 다가가 기계를 사용하면 하루에 백 이랑 정도의 밭에 물을 쉽게 줄 수 있는데 그럴 요량이 있느냐고 물었다.
밭을 매던 노인은 자공을 올려다보면서 그 기계가 어떤 거냐고 물었다. 자공은 “그 기계는 나무를 깎아 구멍을 뚫어 만든 건데 뒤쪽은 무겁고 앞쪽은 가벼워서 물을 퍼내면 펑펑 쏟아져 마치 콸콸 흐르는 물처럼 빨리 흘러 사람들은 두레박()이라 말한다.”고 안내했다. 그러자 밭을 매던 노인은 불끈하고 낯빛을 붉혔다가 이내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스승으로부터 그 기계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지만 기계가 있으면 필히 기계를 쓸(用) 일이 생겨나고, 기계를 쓸 일이 생겨나는 사람은 필히 기계에 관한 마음쓰임, 즉 기심(機心)을 지니므로 밭을 매는 게 힘들더라도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심을 지니면 순수한 빈 마음이 없어지고, 순수한 빈 마음이 없어지면 몸과 정신이 안정되지 못하고, 몸과 정신이 안정되지 못하면 도(道)가 깃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니 몰라서 사용하지 않는 게 아니라 부끄러워서 사용하지 않을 뿐이라고 했다.
자공이 얼굴을 붉힌 채 부끄러워하며 말을 더 이상 하지 못하자, 노인은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다. 자공이 공자의 제자라고 말하자 노인은 당신의 스승은 배움이 깊지 않은 채 넓게만 배워(博學) 성인 흉내를 내면서 허황된 말로 뭇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홀로 거문고를 타면서 처량한 듯 노래함으로써 천하에 명성을 팔러 다니는 사람이라며 폄하했다. 그러면서 자기 몸 하나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일할 때 기계에 의존하면 어느 겨를에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느냐고 꾸짖었다. 
부끄러움으로 인해 자공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그의 모습은 멍청한 채 넋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삼십 리를 간 뒤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자공의 한 제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아까 그분은 어떤 사람이길래 스승께선 그분을 만난 뒤 온종일 정신을 못 차리는 건가요?” 이에 자공이 말했다. “이전에 천하에 선생은 공자 한 분뿐인 줄 알았는데 이런 선생이 더 있을 줄 몰랐네. 내가 스승에게 들은 바로는 일은 옳은 걸 찾고, 공은 이루어지길 바라고, 또 힘은 덜 쓰고 공이 많아지는 걸 보는 게 성인의 도였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가 않네.” 이처럼 자공은 제자에게 노인과 만난 뒤 비로소 깨달은 바를 솔직히 말했다.
도를 지키는 사람은 그 덕이 온전하고, 덕이 온전한 사람은 몸이 온전하고, 몸이 온전한 사람은 정신이 온전하고,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성인의 도를 갖춘 사람이다. 공의 이로움이나 기계의 약삭빠름 같은 건 노인의 마음에는 일찌감치 없었다. 그리고 그 노인은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어디에도 가지 않고, 마음이 원치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혹시 온 천하가 그 노인을 칭찬하여 그분 말대로 따르더라도 초연한 채 돌아보지 않고, 온 천하가 그 노인을 비난하여 그분 말대로 따르지 않더라도 태연한 채 들은 척도 않는다. 이처럼 천하의 비난과 칭찬조차 그 노인의 존재가치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만든다. 이런 사람이 바로 온전한 덕을 지닌 사람(全德之人)이다.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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