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생활 속 원불교

글. 김대현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제대로 확립이 되지 않은 10대 때. 나는 부모님이 보내주는 학원에 다니고 선생님들이 괜찮다고 하는 대학교와 학과정보에 매일매일 갈대처럼 흔들렸다. 자의적으로 무엇을 결정했다기 보다는 누군가의 의견에 휘둘리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스무 살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를 가지 못해 처음으로 실패감과 실망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적으로 제일 두렵고 무서웠던 시기였다. 그때 김포교당 교무님이셨던 이시은 교무님이 일상생활에서 마음을 잡지 못할 때 바로 잡는 법, 경계가 몰아쳐올 때 처리하는 법을 천천히 적용해보라며 가르쳐주셨다. 공부가 안 될 때나 불안감이 몰려올 때 가만히 눈을 감고 나를 내려놓는 공부를 했고, 생각을 멈추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그 시간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가장 편안했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절대적인 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지만, 자신이 편안해지고 삶이 행복해지면 또 잊게 된다. 나 역시 그렇게 지난 시간은 모두 잊은 채 간간히 교당에 얼굴만 비추는 그런 교도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군 복무 때, 일생에서 두 번째로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무언가 나의 그릇에 넘치는 것을 요구하는 상황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나는, 군 입대 때 집에서 가져왔던 포켓 교전을 꺼내 들었다. 처음에는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읽었던 교전이 어느 순간부터 한 구절씩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교전의 목차도 몰랐던 나에게는 엄청난 발전이었다.
원불교에 대해서 그렇게 접근하게 된 나는 그 이후 리더십스쿨과정을 이수하고 원대연(원불교 전국 대학생 연합회) 임원 활동을 했다. 나름대로 공부를 하였고, 소중한 법연들을 만나 큰 힘을 얻었다. 원불교는 나의 내재된 힘을 꺼내주었다.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아침형 인간으로 만들어주었고, 성격이 못돼서 주장만 내세우던 나에게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고 화를 참는 법을 알게 해주었다. 나 자신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기억에 남는 시간을 많이 주었고, 소중한 법연들을 주었다.
솔직히 나는 교리에 대해서는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원불교는 삶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 덕분에 하루를 돌아보며 감사한 것을 찾고, 순간순간의 경계를 처리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제 20대 중반, 대학교 3학년. 앞으로도 힘든 시간과 사건들이 찾아오겠지만, 순간순간의 감정들에 치우치거나 흔들리지 않고 원불교 교리에 맞게 생활해 갈 것이다.  나에게 찾아오는 경계, 맞닥뜨리는 경계, 모두가 은혜다.

용심법 배우기

글. 이성륜

수년 전, 한 환자 아이가 제 방에 안 들어오겠다고 발버둥을 치며 울고불고 난리였습니다. 저를 보고 우는 아이들은 평소에도 많았지만 그날은 유달리 무서워하더군요. 제가 무섭다는 말은 저에게 충격이었고,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날 저는 ‘그 아이가 왜 그랬을까?’ 고민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웃어보려는데, 얼굴이 어색하고 굳어 있어서 마치 마스크를 쓴 느낌이 났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주사나 처치보다 저의 무표정한 얼굴 표정이 더 무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내성적이며 소심한 A형으로, 의대를 마치고 소아과 개업을 했습니다. 소아과를 선택하긴 했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환아와 엄마들을 상대하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자 ‘내가 과를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고 동업자와의 관계, 주변의 스트레스 등까지 겹치면서 불편한 마음들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이것을 다스려 보고 싶었습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원불교를 다닐 때 배운 마음공부였습니다. 마음공부를 어떻게 하는 건지도 잘 모르면서 불편한 마음이 생기면 왜 생겼는지부터 생각해보고, 거기서부터 제 마음을 다스리려 했습니다. 경계가 왜 생겼는지를 알려고 하니, 같은 경계가 여러 번 오면 ‘또 오는구나.’ 하며 이전보다 쉽게 마음이 다독거려졌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경계이거나, 경계임을 알면서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거나, 다스려진 듯 보였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아 눌려져 있거나, 취하고 버린 것이 옳은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또 그동안은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만 경계로 생각하고 다스리려했으나, 어느 순간 희로애락을 일으키는 모든 것이 경계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즐거움의 기준은 대부분 ‘나’와 ‘가족’에 국한되어 있더군요. 진리에 기준을 맞추지 않고 제 기준으로 모든 일을 맞추려 하니 혼란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마다 교당에 나가 법회를 보는 것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지요.
‘일을 당할 때마다 잠시 멈추고 생각을 해서 바른 지각을 얻고, 옳은 판단으로 취사해서 결단력 있게 실천하고, 이를 위해 미리미리 공부를 저축해 경계에 대비하고, 법회와 선공부를 통해 묻고 배우는 공부를 하며, 매일 조석으로 염불과 좌선으로 공백시간을 갖고, 취침 시에는 반성하는 매일 일기를 시행하라.’는 글을 <대산종사법어집>에서 읽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실천하려면 법회에 참석하는 방법이 제일 좋은 것 같아 교당에 열심히 나가려고 합니다. 용심법을 배우기 위해 저는 오늘도 교당에 왔습니다.

일본 여행

글. 박일규

스무 살에 처음으로 친구와 단둘이서 일본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저는 일본에 대해 ‘우리나라를 식민 통치했던 질 나쁜 나라’쯤으로 생각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제가 가진 해외여행 경비로 갈 수 있는 나라는 바다 건너 가장 가까운 나라, 일본뿐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오사카라는 일본 지역을 여행하게 되었는데, 기대이상이었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국제경기를 펼치면, 흔히 한·일전이라고 하여 서로 정말 죽일 듯이 경쟁을 하게 되고, 또 네티즌끼리도 ‘결코 지면 안 된다!’며 적개심을 드러내잖아요. 그런데 현지의 분위기는 영 딴판이었습니다. ‘정말 이렇게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있나?’ 싶을 정도로 시민의식이 높고 도움도 많이 받았으니까요.
당시에 우리는 일본어를 거의 모르고 영어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길을 많이 헤맸습니다. 나름 용기를 내서 시장에서 장사하는 일본인 부부에게 바디랭귀지로 길을 물었습니다. 일본인 부부는 잠시 상의를 하더니 남자 분이 기다리라는 몸짓을 하고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조금 후 그는 야후맵에서 지도를 프린트해 와 저희가 가야할 목적지를 친절히 형광펜으로 표시해 주었죠.
그렇게 친절한 부부의 도움을 받아 관광지에 도착하여 재밌게 놀고선 다시 호텔을 찾아 돌아가려는데 지하철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실수로 부부가 건네준 지도도 잃어버린 탓에 또 헤매게 되었죠. 밤 1시가 넘어서면서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지하철 길을 따라 마냥 걷고 있다가 한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도움이 절실한 표정을 보내자, 그 아저씨는 먼저 어눌한 한국말로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리고 호텔까지 태워다 주겠다며 승용차를 가지고 와서는 “지금 가게를 닫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며 저희를 안심시키더군요.
저는 여행을 가기 전에 ‘일본인은 그냥 나쁜 사람들’이고 ‘일본은 우리나라의 적’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하고나서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우리나라에게 잘못한 것은 일본정부의 잘못이지 일반 보통 시민의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도움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 순간을 지내고 나면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습니다. 해외에서 현지인의 친절에 감동을 받은 경험을 되살리면서 최근에 사귄 외국인 친구들에게 더욱 친절히 따뜻하게 대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그 외국인 친구들이 자국에 돌아가서 ‘한? 완전 좋은 나라야. 너희들도 꼭 가봐!’ 라는 말이 영어로 습관처럼 튀어나올 수 있게 말이죠.

투병생활 속 은혜

글. 강정화

제가 원불교를 처음 만난 건 여고시절이었습니다.
친구를 따라 간 곳은 대야교당이었고, 그곳에서 하얀 저고리와 검정치마를 입고 계시는 교무님의 단아한 모습에 마음이 닿았지요. 교무님의 쪽머리도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어떻게 저 머리를 만들었을까 하고요. 그렇게 호기심에서 시작된 원불교 생활은 학창시절에서 끝이 났고, 결혼해 살면서는 잊고 지냈습니다. 잠깐 어양교당을 나갔었지만 역시나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잘 이어가진 못했습니다.
그렇게 의미 없는 시간이 흐르고 있을 때 큰 딸 초등학교 자모회 모임에서 김법조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20년 이상의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친구는 항상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모든 일에 성실하고 부지런한 것이나, 항상 웃는 모습이 좋아서 친구가 영등원광어린이집에 근무할 땐, 친구를 보러 영등교당에 자주 들르곤 했습니다. 그리고 교도도 아닌 저를 볼 때마다 반겨주시는 조효경 교무님과 호탕한 목소리로 개구쟁이처럼 저를 편하게 대해주시는 이성도 교무님을 만났습니다. 교당은 다시 낯설지 않은 곳이 되었고, 편해서 그런지 더욱 자주 들르게 되었죠.
그때마다 소법당에 걸려있던 일원상은 항상 제 마음에 닿았습니다. 교당에 다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찰나, 친구가 “영등교당에 함께 다녔으면 좋겠다.”고 권하더군요. 어느 날은 대법당에 올라가자 마음이 울컥해지며 눈물이 났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동안 마음속에서 늘 사은님을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교당을 다니던 중 2014년 11월, 누구도 원하지 않던 일이 저에게 생겼습니다. 암 선고를 받게 된 거죠. 그때, 참으로 많은 걸 원망했습니다. 부모님, 남편, 자식,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서 말이죠. 하필이면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생겼을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세상이 너무도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원불교기관(원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고, 매일 일원상을 보면서 교무님들께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산책을 하러 가는 곳은 총부였고, 성탑을 돌면서 참 간절한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입에 항상 맴돌던 일원상 서원문, 영주, 성가 등을 정말 많이 흥얼거리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젠 시간이 흘러 모든 게 원점으로 잘 돌아온 지금. 투병생활을 하면서 마음에 닿았던 사은님의 은혜에 보은하며 생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주변에서 저에게 “원불교는 어떤 종교냐?”고 물으면 사실 대답을 잘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더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원불교는, 교당은, 마음공부를 하는 곳이다.”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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