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학교 선구자, 곽종문 한겨레중고등학교장
시들지 않은 싹은 지금도 자란다

교육의 길에 언제 들어섰을까를 되짚다보면 멈춰지는 순간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가족이 흩어져 살아야 했던 시절. 가난해도 졸업은 해야겠다 싶어 장계터미널 근처 짜장면 가게에서 국민학교 1학년생과 3학년생의 과외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평생 교육인으로서, 남들보다 꽤 이른(?) 시기에 쌓은 곽종문(법명 진영, 도무) 한겨레중고등학교장의 이력이 되었다.
대학시절에는 공심야학을 만들어 활동한 곽 교장. 대한민국 대안교육의 효시인 영산성지고와 성지송학중학교 그리고 한겨레중고등학교까지 흘러온 역사를 두고 그는 “시들지 않는 싹이 지금도 자라는 것 같다.”고 말한다.
대안교육을 위해 살아온 30여 년. 어쩌면 훨씬 이전부터 이어졌던 그의 교육 인생을 두고 사람들은 “고생한다. 힘들겠다. 애쓴다.”고 하지만, 정작 그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이토록 보람있고 가치 있는 삶이 또 있을까?’라고 생각하기 때문.
가난했던 집안 사정을 외면할 수 없어 집요하고 끈질긴 주변의 출가 권유를 모른 척 해왔던 그이지만,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인간된 도리와 세상에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선택의 길목에서 그는 결국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해 지금에 이르렀다.

● 한겨레중고등학교 개교가 올해로 10주년입니다.
“세월을 놓고 보면 비중이 참 크죠. 시간이 너무 빨리 간 것 같아요. 그동안 외부의 괴롭힘을 방어하면서 학교를 키우느라 정신없이 달려왔거든요. 분명한 건 10년 동안 굉장한 압축 성장을 했고, 많은 시련과 역경을 완전히 역전했다는 거예요.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학교의 후원회원이 되어서 큰 힘이 되어주고 있거든요.”
삶의 대부분을 대안교육에 헌신하며 살아온 곽 교장. 그 계기를 물었더니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자의와 타의에 의한 자취생활과 더불어 과외를 했던 경험이 배경인 것 같다며 웃는다. 물론 결정적 계기에는 대학시절 만들어 운영했던 공심야학과, 전주소년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을 빼놓을 수 없는데….



● 소년원 교육은 어떻게 하셨나요?
“야학 운영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4학년 진학을 앞둔 겨울에 직접 전주소년원을 찾아갔어요. 안 된다고 하기에 엄청 때를 썼죠.”
그렇게 다음해 12월 8일 검정고시 날까지 꼬박 1년 동안 80명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12월 20일 아침, 소년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깨끗한 옷을 입고 빨리 오라고 하기에, 저는 ‘누군가 죽었나보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문에 KBS 중계차가 있고, 엄청 부산하더라고요. 아이들 80명이 모두 합격했다는 거예요. 당시 법으로는 검정고시에 합격하면 석방이 됐는데, 그 빡빡머리(?) 80명이 한 줄로 서서 더블백을 매고 걸어나가는 장면에서 너무너무 눈물이 나는 거죠. 그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졸업 후에 가족의 생계를 위한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힘들더라도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요. 그리고 그날 이후 집에 가지 않았어요.”
학창시절 수없이 들었던 ‘모든 사람은 부처’라는 말을 그때 직접 깨달았다는 그. 그 경험은 영산성지고를 만들 때 큰 자신감이 되었다.

● 영산성지고와 성지송학중학교는 한국사회 대안교육의 선두 역할을 해왔는데요.
“고생을 했던 과정은 정말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어요. 성지고를 개척할 땐, 교사가 한 명도 없었을 때가 여섯 번이나 될 정도였죠.”
폐교 위기가 수차례, 중간 중간 학생들이 운명을 달리하는 일도 일어났다. 당장 망할 것 같은 때에도 기적처럼 학교는 다시 살아나 결국 대한민국 최초의 제도권 대안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한국교육 50년사>에 스무 페이지나 기록된 그 과정은 가히 소설 한 권 분량으로 기록해도 모자랄 이야기다.
 
● 힘들거나 섭섭할 때는 없었나요?
“영산선원이 대학 인가가 나면서 영산성지고가 쫓겨날 때 참 서럽더라고요. 그때 대산 종사님께 원망을 표현했는데 주머니에서 너덜너덜한 종이를 꺼내 펴면서 ‘내가 기도는 하고 있다마는….’ 하시더라고요. 그것에 마음이 변해서 다시 와서 살아요. 또 돈이 있어야 하니까 양계장 운영을 19년 하는데, 닭을 몰라서 닭장에서 잔 날이 수백 날이죠.”
어디 그뿐인가. 송학중학교를 만들 땐 19개월 동안 오로지 혼자 4억 원 어치(당시 영산성지학원 이사장인 박청수 교무가 2억 원을 들여 매입한 송학초등학교는 쓰러져가는 50년 된 폐교였다.)의 리모델링을 직접 하고, 천연잔디구장을 만들기 위해 길가의 잔디를 뜯어와 손가락으로 땅을 파서 심기를 수차례. 그러는 동안 그를 비웃고 비아냥거리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음이 상할 법도, 일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도 많았을 텐데 단 한번도 ‘못 해먹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는 그다.

● 그러다 한겨레학교로 오셨네요.
“사실 이 방면은 완전 새롭게 개척해야 하는 거라 안 오고 싶었어요. 그런데 좌산 상사님(당시 종법사)께서 ‘네가 가야겠다.’고 하시잖아요. ‘저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랬더니 좌산님께서 ‘너는 정성도 없냐? 능력의 시작과 끝은 정성이다.’ 그러셔요. 한 길을 쉼없이 걸어오기까지 수많은 출재가 교도님들과 헌신한 선생님들의 도움을 잊을 수 없지요.”
알고 보면 세상에 우연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고 했던가. 탈북청소년을 교육하는 학교로 오게 된 건, 교육이라는 흐름 안에서 만났던 어떤 인연 덕분이기도 했다. 송학중학교 아이들과 갔던 중국여행 한 달. 그때 북한 문제와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을 보고, 탈북학생을 받아 가르쳤던 것. ‘인연이라는 건 끊임없이 이어지고 성장 발전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곽 교장이다.

● 요즘 교육,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누가 그렇게 비유를 하던데, 기업이 시대를 100km의 속도로 달린다면 정부는 55km, 그중에서도 교육은 5km로 달린다고요. 교육은 미래를 바라보고 가장 앞서가야 하는 건데, 현실에선 가장 뒤에 있죠. 특히 한때 이 나라의 희망이자 충격이었던 원불교 대안교육은 20년이 지난 요즘 큰 변화가 없고요. 새로운 미래교육을 준비하지 않으면 더 이상 우리는 대안이라 할 수 없고, 대안도 아니에요. 형상 없는 학교가 쏟아지는 이때가 대종사님의 교법이 만고의 대법임을 펼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예요.”

● 한겨레학교에서 해야 할 일도 많겠네요.
“올해 중점 사업으로 먼저 3국 출신 탈북청소년(탈북여성이 중국에서 낳은 무국적 아이들) 교육을 위해 언어능력을 갖추고, 새로운 탈북자 케이스의 성공모델을 보여주려고 해요. 그 다음, 지금도 좋은 성적이지만 직업교육을 더 성공시켜서 직업학교를 겸한 종합탈북교육센터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또 하나, 선생님들의 수업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지금 선생님들은 통일 이후 북한교육의 선봉이 될 거거든요.”
아울러 밝히는 장기 사업들…. 현재의 학교 형태에 직업종합학교를 겸하게 해서 성인탈북자까지 교육시킬 수 있게 하는 것과 탈북청소년을 위한 사이버고등학교 운영, 그리고 하나원 내에 원불교 법당을 만드는 것이다. 이중 세 번째 사업은 현재 거의 이루어진 상태라고.

● 남북 문제에도 예민할 텐데요.
“남북관계는 인도적, 도리적, 순리적으로 풀지 못하고 정반대로 가고 있어요. 현재의 강공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이고요, 정권이 바뀌어도 다시 회복하기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거예요. 다만 제가 알고 있는 정보로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통일은 아주 가까이, 정말 가까이 와 있어요.”

● 그렇다면 더욱 북한교화 준비를 해야 하지 않나요?
“북한교화에 대해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죠. 그런데 정말로 교화를 해보려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탈북자 한 명이라도 교화해 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통일이 되면 탈북자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때 발판 삼고 교두보 삼을 사람을 교화해야 해요. 10년 사이에 3만 명인 탈북자 정착실태를 알면 통일 후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어요. 교역자 정기훈련 때 시간을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진리적 기도만이 아니라 사실적 훈련, 사실불공, 실지불공, 당처불공으로 해야 할 일도 있는 거잖아요.”

● 젊은 재가출가 후진들이 힘을 삼을만한 말씀을 덧붙여주시죠.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그리고 인생은 위치가 아니라 가치다.’ 제가 12월 20일에 전주 송천동 소년원에서 ‘내게 어떤 시련이 와도 이 길로 살겠다.’고 맹세한 것을 되돌아보면 정말로 인생은 ‘방향과 가치’인 것 같아요. 가시덤불속에 내가 건져야 할 장미가 있는데 가시가 귀찮다고 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거잖아요. 가시덤불에 찍히더라도 꽃을 거두는 것이 저와 우리의 삶이지요.”

● 교육의 가장 큰 보람은 뭘까요?
“소년원에도 괴테 못지않은 명문장가나 추사 김정희도 비껴갈 명필가가 있었고요, 한겨레학교를 졸업하고 고대 의대를 다니는 한 아이는 교수들과 선배들이 만 원, 이만 원 주는 걸 모은 전 재산 45만 원을 은혜학교에 털어주고 거기서 여기까지 하루 종일 걸어오기도 해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훌륭한 마음과 생각과 실력을 가진 아이들이 많아요. 성지고나 송학중에서도 그런 아이를 많이 만났어요. 제가 그 긴 세월동안 월급도 없이 버틸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이에요. 죽어도 여한이 없죠.”

● 행복한 삶의 비결을 알려주세요.
“제가 체력 유지를 위해서 운동을 매일 하는데요, 하다보면 ‘여기가 한계다.’ 하는 느낌이 와요. 저는 한계다 싶은 그때 10분 더 뛰죠. 그렇게 하다보면 체력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요. 심신의 강인함과 의지를 그렇게 다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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