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차나 한 잔 하시게

취재. 노태형 편집인


1. 시지푸스의 하루는 늘 시뻘건 바윗돌 아래서 시작됩니다.
“푸~ 푸~.”
먼저 긴 호흡을 가다듬은 후, 두 손에 불끈 힘을 주어 바위를 밀어 올립니다. 미동도 하지 않던 바위가 서너 번의 안간힘에 서서히 흔들리는가 싶더니, 조금씩 이동을 시작합니다.
“끙~차!”
긴 호흡 사이로 깊은 신음이 빠져나옵니다. 뜨겁고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까지 올리려면 죽을 힘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상까지 애써 올린 바위는 이내 산 아래로 떨어져버리죠. 그런 일이 무한 반복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별 의미없는 일에 힘을 쓴다며 시지푸스를 조롱하기도 합니다. 간혹 산 중턱에 닿으면 “그만 힘쓰고 바위를 굴려버려. 그만 좀 쉬어. 그럼 편하잖아”라는 유혹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립니다. 하지만 바위를 포기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습니다.
본래, 이 일은 시지푸스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가 매번 반복되는 이 일에 싫증을 느껴 떠나버렸죠. 그렇게 해를 품은 바위가 구르지 못하자, 세상이 멈추어 섰습니다. 밝음과 어둠이 사라지면서 거대한 우주가 일순간 멈추어 선 시기가 있었던 거죠. 깊은 잠에 빠졌던 만물은 이때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시 세상이 열렸습니다. 무거운 바위덩이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무수한 시지푸스들이 나타났기 때문이죠. “끼익~ 끼익~.” 한참 녹슬었던 거대한 우주가 다시 힘겹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해가 뜨는 건 시지푸스의 ‘오래오래 반복된’ 무의미한 행위(?)가 빌미가 되었나 봅니다.

2. 중국 당나라 시대 선승 조주 선사는 ‘끽다거(喫茶去,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란 화두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수행자들의 각각 다른 질문에 그는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로 시작해, 이를 이상히 여긴 측근의 질문에도 “그럼, 자네도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로 응답했습니다. 물론 화두라는 게 알아듣는 사람이라면 이내 눈치 챌 수 있는 화법이라 별 어려움이 없지만, 눈치 없는, 아니 그걸 알아들을 만한 그릇이 못 된다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조선시대의 재상 황희의 대꾸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서로 잘잘못을 일러바치는 아랫사람에게 “네 말이 옳다”며 덮어주고, 또 다른 당사자에게도 역시 “네 말이 옳다”며 응답합니다. 부인이 이를 이상히 여겨 답의 연유를 물으니 “부인 말도 옳다”고 한 응답은 오래오래 가슴을 울리는 화법으로 전합니다. 시답잖은 잘잘못 따지지 말고, 그냥 ‘차나 한 잔 하고 가라’는 여운이 차향보다 더 진하게 배어있기 때문이죠. 
소태산 대종사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어느 학인이 스승에게 도를 물었더니, ‘너에게 가르쳐 주어도 도에는 어긋나고 가르쳐 주지 아니하여도 도에는 어긋나나니, 어찌하여야 좋을꼬’ 하였다 한다. 이 뜻을 알겠는가?”
대중이 묵묵하자, 때는 겨울이라 소태산 대종사 친히 밖으로 나가 뜰에 쌓인 눈을 치웠다고 합니다.

3. 어느 봄날 차밭에 서서 옛 선인들의 지혜를 떠올립니다. 허기를 채우기 위함도 아니요, 욕심을 씻어내기 위함도 아니요, 그대로 잔잔히 차 한 잔을 하다 보니 절로 스며드는 생각들입니다. 시지푸스의 차 한 잔, 말이죠.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