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히 말고
쉬지 말고

이혜정 원로교무

취재. 장지해 편집장

유년시절, 교당 땔감을 고민하는 교무님의 말을 들은 8살 어린이가 말했다. “교무님, 걱정 마세요. 우리들이 집에서 땔감을 한 묶음씩 가져오면 되잖아요?” 공가 살림에 남다른 마음을 내보이던 그 어린이는 후에 원불교 최초 여성 교정원장이 된다.
친한 친구가 이화여대 약학과 진학을 앞두고 찾아와서는 자신을 쫓아다니던 남학생 이야기를 하며 “약사가 되어 사랑병 고치는 약을 만들어야겠어”라고 말했다. 그 말에 이혜정 원로교무는 며칠 전 <회보>에서 읽은 ‘교당은 마음병을 치료하는 병원이요, 전무출신은 마음병을 치료하는 의사’라는 구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짐했다. ‘친구는 약사가 되어 사랑병을 고치는 약을 만든다는데, 나는 원불교에 가서 마음병 고치는 의사가 되어야지.’ 그렇게 출가 서원이 마음에 심어졌다.
현직에 있을 때도 퇴임 후에도, 이 원로교무는 늘 환한 웃음과 활기찬 에너지를 가득 전해준다. “모든 것을 좋게 보면 저절로 감사하게 되고, 포용력과 여유가 생기더라”는 한마디에 감사생활하는 삶이 그대로 비친다.

● 퇴임 후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수도인의 삶은 아침에 염불좌선, 낮에 보은봉공, 저녁에 참회반성으로 늘 한결같지요. 거기에 틈틈이 경전연마와 서예, 문인화를 하고 있고, 퇴임할 때 경산 종법사님께서 공부 표준으로 주신 ‘무아선경, 감사생활, 자력불공’을 늘 대조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퇴임한 지 올해로 15년 째. 코로나19 상황이 생기기 전까지는 여러 요청에 열심히 응하면서 각 지방을 활발하게 오갔다. “당시는 ‘퇴임을 했는데 퇴임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었지만, 돌아보니 건강을 유지하는 비법이었더라”라고 말하며 웃는 이 원로교무. 작년에는 외출을 자재하게 되면서 오롯하게 ‘내 공부’를 할 수 있어 좋았다고도 말한다. 일상이 곧 수행인 그의 생활 일면은, 서예실에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선(禪)서예’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 현직에 계실 때처럼 활력과 에너지가 여전하시네요.
“교당 교화 현장에 있을 때는 정말 늘 좋았어요. 교화를 천직으로 알고 살았으니까요. 총부에서 행정을 하게 되었을 때도 나름대로 재미와 보람이 있었지만 교정원장직을 맡았을 때는 걱정이 많았죠. 어릴 때 가정에서 ‘여자는 온순하고 얌전해야 한다’는 식의 교육을 받다 보니까 스스로 ‘여자가 어떻게…’라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7대 종교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 홍일점으로서 역할을 한다는 게 오히려 긍지가 되기도 했어요. 원불교에 와서 좀 와일드해진 덕분이기도 하고요(웃음).”

이 원로교무는 원불교 여성 교정원장의 문열이다. 그 점이 개인적으로는 큰 부담이기도 했을 터. 그때마다 그는 위로 맥을 대는 일처리를 더욱 표준삼았다. 각 부서별로 막혀있던 벽을 터서 현재와 같은 교정원 통합사무실 형태가 만들어진 것도 그때다.

● 사명감의 무게만큼이나 굵직한 일들을 많이 해내셨습니다.
“교정원장을 할 때 그 어렵던 군종과 원다르마센터가 모두 이뤄졌어요. 종법사님 뜻을 받들어 열심히 노력한 큰일들이 이뤄졌다는 것은 자부할만하죠. 스승님의 말씀이라면 한 말씀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그대로 실천하고자 사없는 마음으로 노력했고, 그 결과가 늘 성공으로 이뤄졌던 것 같아요. 뭐든 종법사님과 한마음으로 가려고 하다 보니까 각 부장들과 직원들 역시 일사불란하게 노력을 해주었고요. 내가 ‘아이고, 이걸 해야 하는데 어떡한데’ 하면 늘 ‘도와야죠. 힘써봐야죠’라는 말이 돌아왔었어요.”

교화부장으로 근무할 때, 입교는 했어도 교당에 나오지 않는 젊은 엘리트 여성 인재들을 발굴해서 교화의 선봉장으로 삼겠다는 취지로 전국여성회를 조직했던 그. 공익부장일 때는 교역자들의 치료·정양 사업을 지원하는 법은사업회 재원 마련을 위해 매 교무훈련마다 들어가 1인 1통장 갖기 운동을 호소해 회원을 불렸던 일도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영산선원에서는, 논과 들을 매고, 콩밭을 매는 반농반선의 모든 시간이 즐거웠다.

● 주어진 일을 늘 기쁘게 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나요?
“항상 편안하고 좋은 곳으로 발령 받은 것은 아닌데도, 불평이나 원망 없이 그냥 다 재미있었어요. 해결해야 할 문제가 기다리고 있어도 짜증을 내기보다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고, 그러면 도와주는 인연들이 꼭 생겼죠. 돌아보면, 교당마다 숨통 노릇을 해주는 교도님들의 인연이 있었고, 가는 곳마다 간사·부교무·보좌교무들의 도움도 많이 받아서 지금도 감사를 올려요. ‘그 사람들이 없었으면 내가 그 큰일들을 할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의 감사한 마음은 지금까지도 한결같아서, 함께 근무했던 교무의 투병 소식을 들으면 마음으로라도 꼭 챙겨서 기도를 올린다. ‘내가 출중해서 일이 잘 되었던 것이 아니고,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다’는 말을 꼭 담아달라고 당부한 이 원로교무다.

● 이 길을 가는 데 크게 힘이 된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때는 전무출신 할 사람들은 총부 기숙사에 살면서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그래서 간사 근무를 따로 하지 않고 바로 대학에 진학했죠. 그런데 언니들이 자꾸 우리에게 ‘간사근무 안하고 와서 신심·공심·(공부심) 없는 것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루는 다산 중앙선원 교감님을 쫓아가 여쭤봤죠. ‘언니들이 우리에게 신심·공심·(공부심)이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신심·공심이 납니까?’ 하고요. 그랬더니 어른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하루를 기쁜 마음으로 살았으면 신심이 있는 것이고, 괴로운 마음으로 살았으면 신심이 없는 것이다. 공심은 하루를 살 때 남을 위해 베풀고 살았는지, 나만을 위해 살았는지를 표준 잡으면 된다. 공부심도 하루를 살 때 배우고 살았는지 가르치고 살았는지가 표준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언니는 괴로워할 때도 있는데, 난 늘 기쁘게 산단 말이죠. 그때 그 말씀이 이 길을 가는 자부심이 되었어요.”

● 후배들이 공부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노하우를 전해주세요.
“영산선원에 살 때, 방학을 하면 꼭 대산 종사님을 뵈러 총부에 왔는데 어느 날 배산을 오르다가 질문을 드렸어요. ‘저는 화두가 잘 안 걸립니다.’ 그랬더니 대산 종사께서 ‘교전이 다 화두고 성리니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내가 ‘저는 교전을 보면 다 아는 것 같아서 의심이 걸리지를 않습니다’라고 하니까 산 아래로 펼쳐진 논의 누런 벼를 가리키면서 질문을 다시 하셨죠. ‘저 벼가 누구 것이냐.’ 나는 한참 공부할 때니까 ‘시방 삼계가 오가의 소유’라는 내용이 생각나서 ‘예, 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러시는 거예요. ‘그럼 베어와 봐라. 그렇게 했다가는 너는 쇠고랑 찬다.’ 그 말씀에 쾅 얻어맞은 듯 하면서 화두를 제대로 걸게 됐어요. 공부길을 바로 잡으려면 늘 스승과 어른을 가까이 하고 있어야 해요. 내가 쫓아다니고 질문도 해야 어느 때 그에 맞는 답이 얻어져요.”

● 원불교가 일반 사회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정신을 살려나가야 할까요?
“우선은 스스로 당당해야 하고, 용기를 내야 해요. 그리고 소태산 대종사님이 깨달은 그 내용, 거기에 담긴 의도를 제대로 읽어낼 때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우리는 소태산 대종사님을 형상으로 뵌 것보다 그 법을 제대로 받는 게 중요해요. 어떤 일을 할 때 교운을 믿고, ‘그렇게 되리라’는 믿음과 신심을 가지고 하면 자신감이 생겨요. 매사를 하는 방향, 되는 방향,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면서 나아가야죠. 요즘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을 인플루언서(influencer)라고 하던데, 선한영향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역할을 우리가 해야죠.”

그러나 한번 방향설정을 했다고 하여 바라만 보고 있으면 일을 이룰 수 없다며, ‘이 일을 언제 어떻게 이뤄내겠다’는 목표설정을 함께 세워야 한다고도 강조한다.

“능력이 별로 없는 내가 여러 가지 큰일들을 해낼 수 있었던 건, 이 일은 되리라는 생각으로 꾸준히 밀고 나갔기 때문이에요. 놓지 않으면 반드시 이뤄져요. 마음으로 ‘안 돼, 안 돼’ 하면 진짜 안 돼요. ‘할 수 있다’는 긍정적 마음을 살려 나아가면 좋겠어요.”

●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을 전해주세요.
“현재의 나를 직시할 줄 알아야 해요. 나의 현재 모습은 모른 채 자꾸 다른 것만 쳐다보면 불만이 생기고, 행복할 수 없어요. 대산 종사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공인으로서, 비록 출가위는 못 되었다 하더라도 심법만은 항상 출가위 심법을 쓰라’고요. 부교무 시절에 스승님께 찾아와서 ‘이런 것이 마음에 안 들어요’라고 말씀드리면 절대 혼내지 않으셨어요. ‘우리 혜정이 국이 참 크다’면서 ‘네가 어른이 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정을 맞아야 한다. 그래야 큰다. 너는 큰 스승님을 만났다’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나는 내가 진짜 국이 큰 줄 알고 살았어요(웃음). 그런데 그게 그래요. 마음을 쪼잔하게 쓰려다가도 ‘나는 국이 큰 사람이지’라고 생각하면 마음을 넓혀서 쓰게 되더라고요. 행복이 따로 없어요. 열린 마음이 되고 자비심이 나오고 포용력이 생기면, 저절로 행복해져요.”

● 도(道)가 뭘까요?
“도라고 하면 참 막연한데, 결국 도는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을 말하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어떤 길을 갈 것인가, 평상심의 길이 중요한 것 같아요. 내 좌우명이 ‘급히 말고 쉬지 말고’예요. 급하게 하면 넘어지고, 쉬다보면 더 나아가지 못해요. 세상에 여러 길이 있는데 어느 길로 갈 것인가는 내가 선택할 수 있어요. 급히 말고 쉬지 말고, 한결같은 그 평상심으로 걷는 길이 ‘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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