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에 바람이 산다

계림에서-
취재. 노태형 편집인

‘쏴 아 악~ 쏴 아 아 악~ 쏴 아 아 아 악~.’
한 무리의 바람이 숲을 온통 흔들고선 저 멀리 사라집니다.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성질 사나운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나무들은 한동안 얼얼한 기분에 몸살을 앓습니다. 개중에도 심통 사나운 바람은 거친 발걸음으로 나뭇가지 몇 개 부러뜨려 화풀이를 하곤 하죠. 그래도 다행입니다. 돌풍은 아니니까요.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겠습니까.

천년의 숲, 계림에서 바람을 만납니다.
개구쟁이처럼 흙바람을 일으키던 바람이 어느새 가지에 걸터앉아 팔랑팔랑 초록 잎을 간지럽힙니다. 오래된 나무는 무성한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살랑살랑 햇살을 쓰다듬으며 꾸벅꾸벅 졸고 섰습니다. 가끔 휙~ 지나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긴 하지만, 정오의 숲은 늘 조용합니다.
숲은 바람이 서성이는 집입니다.
가끔 온갖 성질 다 부리며, 다신 오지 않겠다는 듯 떠나간 바람이라도 무슨 변덕인지 금세 되돌아옵니다. 세상 어디를 쏘다녀 봐도 이만한 곳은 없었던 모양이죠. 이렇게 금방 돌아오는 바람도 있지만, 가끔은 저 먼 세상까지 유랑하듯 떠돌다가 오랜만에 들리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런 바람은 대개 목소리가 낮죠.
‘쓰 쓰 쓰 쓰~ 쓰 윽 쓰 윽~’

세상 풍파 다 겪고 나니 마음에도 어느새 여유가 생겼나 봅니다. 신발을 끌 듯 천천히 숲을 배회하며 세상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저 멀리 도시에 사는 두 발로 다니는 짐승들은 잠을 안 자나 봐요.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선 뺏고 뺏기기를 반복하는데, 누구는 없어서 한숨이고 또 누구는 더 차지하지 못해 한숨을 내어요.” 공수래공수거를 왜 모르는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찹니다.

수다쟁이 바람은 으레 그렇듯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하고 싶은 말이 그리도 많은지 떠날 듯 떠날 듯 발걸음을 옮기지 못합니다. 마치 엄마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일러바치는 아이처럼 연신 숲을 흔들죠.

“나무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로 시작해서, 저 너머 산 아래 사람들은 바깥출입을 끊었는데 그건 지금 코로나가 세상을 휩쓸고 있어 그렇다는 둥, 그래도 밤거리에는 몰래몰래 입도 가리지 않은 철없는 아이들이 코로나를 퍼뜨리고 다닌다는 둥, 바람 같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놓습니다. 하나 마나 한 소리들이지만 곧잘 들어주는 나무들도 오늘은 영 심드렁합니다. 날씨가 뜨거운가 보죠.

그래도 제일 반가운 건 장난기 많은 어린 바람들입니다.

‘찰랑 찰랑~ 짤랑 짤랑~’

무슨 호기심이 그리도 많은지,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니며 초록 잎들을 만져보고 들추어가며 까르르 까르르 거립니다.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데요. 그 바람에 햇살들이 틈바구니를 헤집고 땅이나 가지에 내려앉아 쉴 수 있으니까요. 혹 큰바람이라도 만나면 얼른 가지 아래에 몸을 숨겼다 다시 고개를 내미는 모습은 다람쥐를 닮았습니다. 토닥토닥, 오래된 세월은 철없는 생명에게서 위로를 얻습니다.

 큰 나무 그늘 아래서 가만히 몸을 맡깁니다.

갑자기 쓰윽~ 바람이 일어납니다. 어디서 온 바람인지, 어떤 바람인지, 정체도 없는 바람이 강아지처럼 귓가를 핥듯 하더니, 마음까지 훑고 지나갑니다. 저 멀리 산골에서 떠온 약수 한 사발을 건네듯 말이죠. 준 것도 없는데 공짜로 받아 마시려니 괜히 염치가 없어집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수다를 떨다 보니 한나절이 훌쩍 지나갑니다. 숲에는 바람이 삽니다. 여름은 바람의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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