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굽이진 강이 되고
산은 깎아지른 풍경이 되다

취재. 노태형 편집인

1.
‘투둑 투둑 툭 툭…’
산골에 비가 내립니다. 나뭇잎을 타고 내린 빗방울이 대지에 뚝 떨어지고…. 하얀 입김을 토해내는 산의 신음이 안개처럼 번집니다. 작은 빗방울들이 실지렁이처럼 도랑을 이루어 꿈틀꿈틀 산 아래로 내려섭니다. 그렇게 모인 빗방울이 능선 사이로 길을 만들면 개울이 되고, 산 사이로 휘둘러 흐르면 강이 되죠.
“참 무심하네. 오자마자 떠날 생각만 한 모양이야.”
“그러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네.”
모처럼 비를 만난 나무들이야 세상의 이런저런 소리를 듣고 싶었을 텐데. 빗방울이 떠난 자리에 할퀸 자국만 상처의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떠나는 이의 슬픔보다 보내는 이의 아픔이 더 크다는 걸 알긴 알까요!

2.
어느새 비의 계절이 다가옵니다. 문득 걱정이 앞서네요. 왜냐고요? 비가 억수처럼 퍼붓는 계절이 지나면 세상은 또 달라져 있기 때문이죠. 사실, 작은 빗방울이 세상을 도려내는 날카로운 조각칼이란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높은 산에 아찔하게 걸려있는 벼랑은 빗방울을 호랑이처럼 겁냅니다. 또 어떤 살점을 도려내어 떼어갈지 모르니까요. 비오는 날, 외진 산 위에서 울려 퍼지는 그르렁그르렁 소리는 벼랑이 아픔을 참아내며 내지르는 소리인걸요. 대지는 또 어떻고요. 큰비가 한번 지나갈 때마다 살갗은 찢어지고 터져서 붉은 황톳물을 쏟아냅니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강은 검은 멍을 남기고, 평지로 달려온 강은 마치 굶주린 듯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리죠.
그 세월만도 백 년, 천 년, 만 년, 억 년…. 억만년의 긴 세월에 상처는 강이 되어 흐릅니다.

3.
“할머니 할머니, 물 한 모금 주세요.”
“애고, 우리 손자가 목이 마른 모양이구나.”
벌컥벌컥 들이키는 냉수 한 사발에 웃음이 번집니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요.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이죠. 물 한잔 건네는 여유가 우리 생명입니다.
흔히 물 같다고 합니다. 무색무취.
물은 하늘에서 떨어져 아래로, 아래로 흘러 대지를 적셔줍니다. 밑에서 솟는 물도 알고 보면 위에서 흘러내린 물인걸요. 물은 서두르는 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먼 길도 멈추는 법이 없고, 산을 넘어 질러가는 법도 없습니다. 가파른 길에서는 여울이 되어 흐르고, 어느 마을 앞에서는 쉬엄쉬엄 쉬어가기도 하죠. 산이 막히면 굽이굽이 돌아가는 물길이 아름다운 이유는, 꼭 바다만을 꿈꾸며 흘러가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은 거부가 없습니다. 누굴 만나도 하나가 되죠. 동에서 온 물이거나 서에서 온 물이거나, 산에서 온 물이거나 들에서 온 물이거나, 실개천을 타고 온 물이거나 본래 강줄기 물이거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함께 어울렁더울렁 맑히며 걷는 거죠.

4.
산과 강이 만나면 풍경이 됩니다.
강은 산의 거울이 되고, 산은 강의 울타리가 되죠. 혹 심술 난 산이 강의 길을 막더라도 결코 그곳을 뚫고 지나는 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먼 길일지라도 휘휘 돌고 돌아 곡선을 그리며 흘러가죠. 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길을 딱 막고 서서 강을 멈추게 하는 법은 없습니다. 산은 강줄기를 따라 능선을 그리며 따라갈 뿐입니다. 가끔 건너지 못하는 그리움은 벼랑으로 멈춰 명경대가 됩니다.
그런 산수화 속을 어떤 이가 거닙니다. 억겁의 세월을 따라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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