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無爲), 즉 하고자 함이 없으면
다스려지지 않는 바가 없다

 글. 김정탁

3장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是以聖人之治, 虛基心 實基腹, 弱基志 强基骨.   
常使民無知無慾, 使夫智者不敢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아야 백성이 다투지 않고,
구하기 힘든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아야 백성이 도둑질하지 않고,
하고자 함을 드러내 보이지 않아야 백성의 마음이 어수선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성인의 다스림은 백성의 마음을 비우면서 배를 채우고,
백성의 뜻을 약하게 하면서 뼈를 튼튼히 한다.
늘 백성으로 하여금 앎이 없도록(無知) 하고, 욕심을 없도록(無慾) 한다.
저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이 감히 무언가를 하지 않도록 한다.
하고자 함이 없음(無爲)을 행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바 없다. 

<도덕경>은 간결하고 평범한 문체를 자랑한다. <논어>, <맹자>와 비교해서도 그러하지만 <장자>와 비교해서는 특히 그러하다. 그래서 누구든지 <도덕경>과 쉽게 마주하지만 그 이해가 만만치 않음을 금세 깨닫는다. 물론 대충 해석하려고 들면 이런 어려움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지만, 정확한 해석을 위해 조금만 애쓴다면 해석이 쉽지 않음을 실감한다. 
<도덕경> 해석을 제대로 하려면 몇 가지 열쇠를 풀어야 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열쇠가 도덕경 설계도를 푸는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을 그의 생각이 미치는 대로 자유로이 집필했기보다는 나름의 계획, 즉 설계도를 갖고서 체계적으로 집필했다고 보인다. 따라서 이런 설계도를 찾지 못한 채 해석에만 골몰하면 글의 전체 내용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다. 심지어 앞뒤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경우도 생겨날 수 있다. 특히 도덕경 1장, 2장, 3장을 해석하는 데에는 이런 설계도를 찾는 일이 중요하다. 이 때문에 필자도 이 점에 유의해서 1장과 2장을 해석한 바 있다.

먼저 1장, 2장, 3장을 해석하는데 동원되어야 할 설계도는 이 장들이 천도(天道), 인도(人道), 치도(治道)를 제각각 설명한다는 설계도이다. 동아시아 사상은 크게 천도, 인도, 치도로 구성되고, 이것들은 흥미롭게도 서양의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과 비교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1장은 천도, 2장은 인도, 3장은 치도를 차례로 다룬다. 따라서 1장, 2장, 3장은 천도, 인도, 치도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장에 해당하므로 도덕경 서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4장부터 천도, 인도, 치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므로 본론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치도를 다루는 3장의 설계도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치도를 행하는 사람의 욕망(欲)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치도를 행하는 사람은 현명함을 높이고자 하는 욕망, 재화를 소유하려는 욕망, 남보다 뛰어나려는 욕망을 지니게 마련이다. 치도를 행하는 사람에게 이런 욕망들이 어째서 나타날까? 참고로 여기서 욕(欲)을 욕심으로 번역하는 건 무리이다. 욕심으로 번역하려면 도덕경 원문이 ‘욕(欲)’이 아니라 ‘욕(慾)’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노자가 욕(慾) 대신 욕(欲)을 사용한 건, 욕(慾)은 특별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욕(欲)은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보편적 현상으로 파악해서이다.    

치도를 행하려면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무엇보다 요구되는데, 첫 번째로 요구되는 자질이 인품과 능력일 것이다. 그런데 인품은 구체적으로 어짊으로 나타나고, 능력은 재능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어짊과 능력의 의미를 모두 지니는 현(賢)을 숭상하는 욕망이 가장 중요한 자질에 속한다. 유가는 특히 이런 입장을 지지하는데, 노자는 그렇지 않다. 노자는 오히려 현을 숭상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를 현을 숭상하지 않아야 백성이 다투지 않는데서 찾는다.

그런데 현(賢)을 숭상하면 백성이 오히려 따를 텐데 어째서 노자는 백성이 다툴 거라고 보았을까? 아마도 적당히 현을 숭상하면 괜찮지만 지나치게 현을 숭상할 때 생겨나는 부작용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현 뿐만 아니라 인(仁)·의(義)·예(禮)·지(知) 등도 지나치게 숭상하면 부작용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현을 비롯해서 인·의·예·지도 원통자재한 건데, 모난 데를 깎아서 둥글게 하다보면 자칫 모가 난다. 장자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표명한 바 있다.

도(道)가 훤히 드러나면 도가 아니며,
말(辯)로 의미가 쉽게 구분되면 충분치 않으며,
어짊(仁)이 상습화하면 두루 미치지 못하며,
청렴(廉)이 선명히 드러나면 신뢰를 받지 못하고,
용기(勇)가 용맹스러우면 진가를 잃는다.
이 다섯 가지(道·辯·仁·廉·勇)는 원통자재한데
모난 데를 깎아서 둥글게 하다보면 자칫 모(方)가 나기 싶다.  (<장자> 제물론)

현의 자질을 지닌다고 모두 지도자의 길을 가는 건 아니다. 지도자란 어쩌면 공적 목표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지도자에게 동기부여는 반드시 필요하다. 세상에는 지도자의 자질을 지닌 사람은 많지만 일부만 지도자의 길을 가는 건 이 때문이다. 만약 동기부여가 이들에게 제대로 제시되지 못하면 지도자의 길은 꽃밭이 아니라 가시밭길이다. 그래서 지도자의 길이 꽃밭이 되려면 현실적 욕망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물질적으로는 재화이고 신분상으로는 벼슬이다. 이런 재화와 벼슬이 동반되지 않으면 현의 자질을 아무리 지녀도 지도자의 길을 포기하고 말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노자가 화(貨)를 귀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주석서들은 화(貨)를 재물로 번역하고 마는데 이는 노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처사이다. 재(財)와 화(貨)는 귀중한 사물이라는 점에선 같지만 상징성 여부에 의해 크게 달라진다. 상징성이 낮으면 재인 반면 상징성이 높으면 화이다. 그래서 쌀이 대표적인 재라면 보석은 대표적인 화이다. 또 벼슬이 높아질수록 벼슬은 재에서 화로 바뀔 수 있다. 일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사람 중에 높은 벼슬보다 낮은 벼슬인 사람이 많아서이다. 그렇지만 단지 화라고 말하면 설명이 부족한 듯싶어 여기선 재화쯤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여기서 장자가 부정적으로 보는 건 오로지 화(貨)이다. 화는 의미부여의 정도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어서이다. 의미부여에 따라 결정되는 가치는 실제가치가 아니라 상징가치인데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재와 화를 둘러싼 욕망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 재는 일정 정도 쌓이면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지만 화는 그렇지 않다. 쌀의 경우 먹을 정도만 있으면 되고, 또 많이 쌓이면 썩는 걸 오히려 걱정해야 한다. 반면 화는 많으면 많을수록, 크면 클수록, 높으면 높을수록 사람들이 좋아하므로 욕망에 있어 그침이 없다. 금 1량보다 10량을 선호하고, 낮은 지위보다 높은 지위를 부러워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화를 선호하면 불필요한 욕심이 자꾸 만들어진다.   

이 때문에 지도자에게 동기부여로 작용하는 재화라는 요인에 대해 노자는 강하게 부정한다. 이런 재화를 귀하게 여기면 백성이 도둑질을 벌여서이다. 사실 도둑놈이 도둑질하는 물건 중에 재(財)보다는 화(貨)가 많다. 화는 부피에 비해 값이 비쌀 뿐 아니라 훔치기도 쉬워서이다. 물론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이 높은 벼슬을 바라는 것도 일종의 도둑질에 속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구하기도 쉽지 않다. 어쩌면 재화를 귀하게 여길수록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는 역설이 성립해서이다. 따라서 구하기 힘든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아야 백성은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다음 호에 <도덕경> 3장 계속)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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