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기(1945~1948)
‘건국사업’ 참여와 정산 종사

글. 박윤철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3년 6월 1일에 불법연구회 최고지도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거연히 열반에 들었다. 소태산 대종사의 열반은 불법연구회를 회유, 압박하여 친일(親日) 종교단체화 하려던 일제의 황도불교(皇道佛敎)화 정책에 부정적 영향을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그보다도 조선총독부 당국은 ‘한국의 간디’로 칭송받던 소태산이 부재한 불법연구회는 머지않아 교권(敎權) 다툼이 일어나 스스로 붕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불법연구회는 6월 6일에 전국 각지에서 운집한 대중들과 이리 불교연맹 산하 7개 종단 승려들이 참석한 가운데, 불교시보사(佛敎時報社) 사장 김태흡 스님의 주례로 소태산 대종사의 영결식을 무사히 마쳤다. (<매일신보> 1943년 6월 8일자 2면, ‘박종사 가시다’, 사진자료 참조)
이어 6월 7일 총부 간부회의는 일사불란하게 수위단 중앙단원인 정산 송규 총무부장을 종법사로 추대하고, 이튿날인 6월 8일에 취임식을 거행함으로써 신속하게 새 지도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7월 19일에는 일본 조동종 승려이자 서울 박문사(博文寺) 주지인 우에노 ?에이(上野舜潁) 스님이 추모 법설을 하는 가운데 소태산 대종사의 49재 종재식도 무사히 마치기에 이르렀다. 또한 새 종법사 정산 종사는 소태산 열반 이후 매월 주최하는 임원 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함으로써 교단 지도체제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 초중대한 시국에 처하여 우리가 무사히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요체는 각자의 철저한 각성과 단결에 있으니, 이해를 같이하고 고락을 같이하며, 나아가서는 생사라도 같이할 만한 각성과 단결이 있으면, 설사 일시적으로 어떠한 역경과 난경이 있다 하더라도 문제될 바 없을 것이다.(<한 울안 한 이치에>, 제1편 제4장 2~5절)

그리고 1944년 10월경에는 교단 안팎의 위기상황 속에서 흔들리고 힘겨워하는 교도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교운과 국운의 미래를 예시하고 격려하였다.

계산에 안개 개면 울창하고 높을지요(稽山罷霧鬱嵯峨) / 경수에 바람 자도 잔물결
은 절로 있다(鏡水無風也自波) / 봄철 지나 꽃다운 것 다 시든다 말을 말라(莫言春度芳菲
盡) / 따로이 저 중류에 연밥 따는 철이 있다(別有中流採荷)    

정산 종사를 정점으로 ‘생사라도 같이할 각성과 단결’ 속에 불법연구회는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을 맞이한다. 1945년 8월 15일! 이 날은 식민지 조선 땅 안에서 혹독한 식민통치를 당하고 있는 2천만 동포뿐만 아니라, 일제 36년간 살 길을 찾아 또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해외 각지에서 분투하던 동포들에게도 참으로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8.15해방 당시 해외 동포들의 심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국선>이라는 노래 가사를 소개해 보자면,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꽃을 /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깃발을 /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라고 하여 해방에 대한 해외동포들의 기대와 희망을 노래했다. 그리하여 8.15 이후 해방된 조선 땅에는 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있던 애국지사를 비롯하여 징용과 징병, 근로정신대 등으로 강제 동원된 동포들이 물밀 듯 조국을 향한 귀환 길에 올랐다. 귀환 동포의 수는 하루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수만 명에 이름으로써 이들에 대한 식사와 숙소 제공, 환자에 대한 긴급 구호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른바 ‘전재동포구호’ 문제가 해방정국 초기의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주지(周知)하듯이, 해방정국기 교단의 최대 과제는 안으로 식민잔재를 청산한 교단체제 정비와, 밖으로 전 민족적 과제인 ‘건국사업’에 협력 동참하는 일이었다. 정산 종사는 1945년 9월 초에 총무부장 송도성에 지시하여 전재동포구호사업에 교단이 지니고 있는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참여할 것을 지시했고, 명을 받은 총무부장 송도성은 박창기, 유허일, 황정신행, 박제봉, 최병제, 성의철, 박해운, 성성원 등의 발기인과 함께 다음과 같은 <전재동포구호사업 취지서>를 작성, 모든 교당과 기관에 발송하여 재가 출가 교도들의 참여를 호소하였다.

우리 조선에도 자유해방의 날이 왔다. 조선 독립의 커다란 외침이 한 번 전하게 되자 근역 삼천리 방방곡곡에 넘쳐흐르는 환희의 물결은 사뭇 그칠 줄을 모르고 뛰놀고 있다. (중략) 목하 유일한 급무로는 전재동포 원호문제이니 남에서 일본, 북에서 만주 중국 등지로부터 조수 밀리듯 하는 전재동포가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피곤함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노지에 즐비하게 쓰러져 있는 참혹한 현상을 볼 때 목석이 아닌 사람으로서야 어찌 이에 눈물이 없고 감동이 없을 바이랴. 이에 본회에서는 전재동포 원호회를 설립하고 건국위원회와 연락하여 일대 구호운동을 환기코자 하오니 각지 동덕은 이에 진심으로 찬동하시와 열렬한 성원지조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을유(1945) 9월.
  
<원불교 교사>에 따르면 불법연구회의 전재동포구호활동은 1945년 9월 5일에 전북 익산, 동년 9월 10일에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매일신보> 1945년 10월 2일자 기사에서도 정확하게 확인된다.

13개 원호단체, 조선원호회단체대회 구성
경성을 비롯하여 조선 안 각체에는 수만호 원호단체가 뒤를 이어 설립되고 있거니와 경성에 있는 조선인민원호회와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에서는 이들 여러 단체를 통합하여 3천만 겨레의 총력으로써 전재동포에 대한 더욱 힘찬 구제운동을 일으키고자 여러 가지로 극력 주선한 결과 9월 30일 오후 2시 반 경성 숙명고녀에서 조선원호단체대회를 구성하였다. 이에 참가한 단체는 다음과 같다.
구제동맹, 재외이재동포원호회, 불법연구회 구호부, 조선사회사업협회, 조선청년단 구호부, 고려동지회 구호부,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건준 후생부, 전재동포원호동맹, 불교단 구호부, 조선인민원호회, 건국부녀동맹, 경성실업자동맹 구호부 등 13개 단체인데 (중략) 연합위원의 임시 사무소는 수송정 명성여학교이며 위원과 연합회 기구는 다음과 같다.
원장: 정태희 위원: 장일, 유석기, 유엽, 송도성, 권태휘, 김석길, 서석전, 임인식, 정운근, 문영표, 박승종, 유병덕(결석)
 
역사에는 이른바 큰 전환의 시기가 있게 마련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계기로 찾아온 해방정국기(1945~1948)는 신생 종교단체 불법연구회에 있어 안팎으로 큰 전환의 시기였다. 그 큰 전환에 있어 바깥으로 가장 큰 과제가 바로 전 민족이 참여하는 ‘건국사업’에 동참하는 일이었고, ‘건국사업’ 초기의 최대 과제인 ‘전재동포’ 구호사업에 참여하는 일이었다. 정산 종사는 해방정국기 불법연구회가 당면한 바깥으로의 역사적 과제를 정확히 내다보고, ‘건국사업’에 전면적으로 동참하였다. 그 첫 과업이 바로 전재동포구호사업에 교단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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