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산 박길진 종사의 ‘일원철학’의 연원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

글. 박윤철

1980년대 초반, 한국사회는 아직 실존주의(實存主義) 철학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 증거로는 프랑스 출신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문예출판사, 1981)가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었고, <실존철학>(프리츠 하이네만, 문예출판사, 1980)이라는 이름의 책도 널리 유행하고 있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1980년에 ‘5월 광주’를 군대 안에서 겪은 필자 역시 한동안 실존주의 철학에 빠져든 적이 있었고, 그 부산물로써 ‘실존주의에서 본 종교’(<정신개벽> 제 1집, 신룡교학회, 1982)라는 소논문을 쓴 적도 있었다.

숭산 종사의 ‘일원철학’의 연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뜬금없이(?) 실존주의를 언급한 이유는 따로 있다. 이유인즉, 숭산 종사의 동양대학 철학과 학부졸업논문 주제가 ‘실재(實在)의 연구-쇼펜하우어를 중심으로’(1941년)이고, 동양대학 철학과 시절 내내 숭산 종사가 심혈을 기울여 탐구했던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가 바로 실존주의 철학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숭산 종사는 생전에 배재고등보통학교(이하 배재고보) 시절을 회고하면서 ‘입학 초기에는 독립운동에 가담하려고 했으나, 상급 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점차 인간의 본질, 우주의 궁극 문제 등 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그 방향이 전환’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나는 4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생각이 서서히 전환되기 시작했다. (중략) 이때부터 나는 안으로 나 자신 인생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데 귀결되었다. 그래서 철학 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철학개론과 논어, 맹자, 중용에 이르기까지 독파하였고,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철학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으며 그 방향의 공부에 집중하였다.(<숭산종사 추모기념대회: 아, 숭산종사>, 2004, 43쪽)

위 내용을 통해 숭산 종사의 배재고보 시대는 ‘독립운동에서 철학으로’ 커다란 사상적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필자는 바로 이 같은 전환을 숭산 종사 전 생애에 있어서 가장 의미심장한 전환, 곧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왜냐면, 바로 그 같은 대전환이 있었기에 숭산 종사에 의한 ‘일원철학’이 형성될 수 있었고, ‘일원철학’을 핵심으로 하는 원불교학(圓佛敎學)이 보편적인 학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글로벌 개벽대학’ 원광대학교(圓光大學校)가 존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숭산 종사는 언제부터 쇼펜하우어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던 것일까? 앞에 인용한 숭산 종사의 회고에 의하면, 배재고보 시절에 이미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빠짐없이 수집하여 독파”(위의 책, 44쪽)하였다고 한다. 숭산 종사의 배재고보 시절은 모두 5년간인 바, 시기적으로는 1931년에서 1936년경으로 17세에서 22세 때까지이다. 인생에 있어서 지적 호기심과 정서적 감수성이 가장 넘쳐 나는 시기에 쇼펜하우어에 푹(?) 빠졌다고 볼 수 있으며,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 입학 이전에 이미 쇼펜하우어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숭산 종사는 왜 특별히 쇼펜하우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 배경과 이유를 숭산 종사가 남긴 동양대학 철학과 학부졸업논문 맨 앞에 나오는 ‘서언(緖言)’(아래 사진 참조)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서언’의 일부를 한글로 옮긴다. 

나는 먼저 나의 입장에서 논(論)을 전개해 가고자 한다. 그저 훈고학적(訓學的)으로 논하고 싶지 않다. 또한 오로지 개념적(槪念的)으로 설명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나 자신이-인용자 주) 체험하고 증명한 입장에서 보려는 태도를 취하고자 한다. 논하는 기술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본(本) 문제를 풀어가려고 생각하는 바이다. 대담불손(大膽不遜)한 일이지만 나는 오직 그것(논하는 기술-인용자 주)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졸렬한 의견이어서 예컨대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평소 고뇌하고 있던 문제에서 일종의 광명을 찾은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바로 그 점에 대하여 써보려고 생각한 것이다.(<실재의 연구-쇼펜하우어를 중심으로>, 동양대학 철학과 학부졸업논문, 1941년, 원광대학교 숭산 기념전시실 소장, ‘서언’ 참조, 원문은 일본어)

위 ‘서언’에서 우리는 숭산 종사의 학문하는 자세, 철학적 사유방식의 특징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첫째, 숭산 종사는 훈고학적 접근을 거부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훈고학이라면 청(淸)나라 말기의 고증학(考證學)을 들 수 있으며, 근대일본의 학문경향 역시 거의 대부분 훈고학적 전통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데 숭산 종사는 이와 같은 훈고학적 학문을 단연코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숭산 종사는 ‘개념적’ 서술을 중시하는 학문적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서양 근대철학이 추구했던 합리적 이성주의, 논리적 실증주의의 문제점을 간파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널리 알려져 있듯이, 서구의 근대철학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합리적 이성(理性)이다. 이것을 일러 합리주의 또는 이성주의라고 한다.

이성이 경험이나 감성과 어떻게 관련되는가에 따라 합리주의(이성주의) 철학은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되는데, 헤겔에 이르러 이성을 절대화함으로써 합리주의 철학은 최고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자, 이성의 절대화로 치닫는 근대철학을 비판하는 새로운 철학적 조류가 형성된다. 그 일단이 바로 생철학(生哲學)이다. 생철학은 이성주의를 정면에서 반대하고 근대철학이 외면해 버렸던 비이성적 영역 곧 생(生)의 의지(意志)에 주목하는 바, 바로 그 생철학의 ‘무녀리’ 철학자가 쇼펜하우어이다. 위에 인용한 숭산 종사의 학부졸업논문 ‘서언’ 내용은 한 마디로 생의 의지를 철학적 사유의 핵심으로 삼은 쇼펜하우어의 생철학적 테제에 한 치도 어김없이 부합(符合)한다. 일찍이 배재고보 시절부터 쇼펜하우어에 심취했던 숭산 종사의 철학적 사유방식이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1788년 유럽의 항구 도시 단치히(지금의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상인인 아버지와 소설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21세 때인 1809년부터 25세 때인 1813년까지 독일의 괴팅겐대학교, 튀링겐 주립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820년대에는 힌두교와 불교를 접했다.

그는 고대의 동양사상가들이 서양과는 다른 환경, 언어, 문화 속에서 근대적인 서양철학의 과제에 대해 같은 결론을 말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 같은 새로운 발견을 쇼펜하우어는 글로 써서 남겼고, 서양에서는 최초로 동양철학의 세련된 점을 서양인 독자들에게 널리 알렸다. 요컨대, 쇼펜하우어는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간의 유사성을 강조한 철학자이자, 무신론자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독창적인 철학자였다. 따라서 우리는, 숭산 종사야말로 근대한국 철학자 가운데 쇼펜하우어의 매력을 가장 일찍 알아본  한국철학자로 다시 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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